"차마 석민이에게 팀을 위해 희생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와는 달리 '희생'의 미덕을 중요하게 여기며 기록으로도 인정해주는 스포츠다. 팀 동료의 진루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번트나 득점을 위한 희생플라이는 타율 계산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 고과에서도 플러스 요인이다. 그래서 선수들은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희생을 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타자가 아닌 투수의 경우는 '희생'의 무게감이 약간 다르다. 팀 배팅에 희생의 가치를 담는 타자와는 달리 투수들이 '희생'을 한다는 것은 결국 팀을 위해 등판을 자원하거나 당장 필요한 보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자칫하면 투수가 다칠 수 있다. 육체적으로도 부상의 위험이 따를 수 있고, 낯선 보직을 맡게될 경우 밸런스가 흐트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투수 출신인 KIA 선동열 감독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지만, 선수에게 '희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가 먼저 감독의 의중을 꿰뚫었다. 사실 감독의 의중보다는 위기에 처한 팀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윤석민의 마무리 보직 이동에 숨은 이야기다.
선 감독은 6일 부산 롯데전을 앞두고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놨다. "시즌 도중에 앤서니를 퇴출하고 나서 계속 마무리가 불안했다. 코칭스태프와의 회의를 해보니 윤석민이 마무리를 맡아주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문을 연 선 감독은 "하지만 끝내 그 얘기를 석민이에게는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올 시즌이 윤석민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올해 윤석민이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 감독은 "올해 초 WBC 참가 여파로 부상 때문에 많은 고생도 했고, 또 시즌 중 해외 진출도 포기했다. FA를 앞두고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나. 그런 석민이에게 팀을 위해 희생해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선 감독은 얼마전 윤석민과의 면담에서 "네가 팀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돼야 한다"며 부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윤석민을 격려했다. 그러나 이 면담은 결과적으로 윤석민이 스스로 마무리를 자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현 상황에서 팀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던 윤석민은 결국 이틀 뒤 다시 감독을 찾아가 "마무리를 맡겠다"며 보직 전환을 자원한 것이다.
윤석민은 2005년 데뷔 후 험난한 가시밭길을 통과하며 '에이스'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온실 속 화초'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2005~2006년에는 마무리로 상시 대기하며 팀의 뒷문을 막아냈고, 2007년에는 선발로 전환했으나 '시즌 최다 18패'의 시련을 맛봤다. 그러나 윤석민은 꿋꿋이 일어섰다. 2008년 두 자릿수 승리를 따냈고, 2009년에는 시즌 초반 마무리를 했다가 다시 선발로 변신해 팀 우승에 기여했다. 따라서 올해의 '희생' 앞에서도 꿋꿋이 제 몫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희생'의 미덕을 알고 있는 윤석민에게는 시련을 이겨낼 충분한 힘이 있다.
부산=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