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은 온통 연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어떤 질문에도 가볍게 답하는 법이 없었다. '이토록 고민하고 연기를 하니 그런 연기가 나올 수밖에 없겠다'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난해 '파수꾼'과 '고지전'으로 영화계의 샛별로 부상한 배우 이제훈(28). 그해 열린 제32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신인남우상을 수상한 뒤 울먹이며 "자만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연기하겠다"고 소감을 말한 그가 어느새 또 다른 환경에서 한 뼘 더 성장해 있었다. 그는 지난달 종영한 SBS 월화극 '패션왕'에서 굴지의 패션 그룹 후계자 정재혁 역을 맡아 단숨에 브라운관 스타로 발돋움했다. '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은 커도 이제훈이라는 배우만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라는 평가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마냥 즐기진 않았다. "배우로서 기분 좋은 멘트일 수 있지만 그래도 작품 자체로 평가받고 싶은 입장에서는 웃을 수만은 없죠. 좋은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고, 훌륭한 스태프들이 계셨기 때문에 정재혁이라는 캐릭터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여성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재벌 2세 캐릭터도 이제훈을 만나면 뭔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발리에서 생긴일'의 이선미 · 김기호 작가가 그려내는 갈등구도라면 등장인물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것은 기본이다. '진지한 배우' 이제훈의 고민이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사진=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보통 재벌 2세라고 하면 백마탄 왕자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를 자극하는 인물로 받아들이기 쉽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재혁을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 처음 봤을 때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물로 그렸어요. 그러면서도 내면은 뜨겁고 타오르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죠."
그가 이번 작품에 출연한 이유에는 보은의 의미도 담겨 있다. "작가님들이 영화 '고지전' 개봉전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저에게 작품 출연 제의를 해주셨어요. 당시 준비하시던 작품은 제작이 무산됐지만 그 때의 고마움에 '패션왕'에 흔쾌히 출연할 수 있었어요."
'패션왕'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장면이 있었다. 바로 정재혁이 강영걸(유아인)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은 후 이가영(신세경)을 남겨두고 떠나는 차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손을 내밀며 "잘자"라고 짧게 내뱉는 장면 때문에 수많은 여성 시청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독한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고선 절대 나올 수 없는 연기"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는 "재혁이 (가영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표현했다"며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패션왕'이 방영을 시작할 무렵 영화 '건축학개론'이 개봉되면서 그는 브라운관과 스크린 쌍끌이 인기 몰이에 성공했다. 빠듯한 드라마 촬영 스케줄 때문에 영화 홍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했던 그는 "아쉽지만 영화 팬들의 사랑과 애정이 저한테도 미쳤다"며 "영화가 잘 돼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제훈은 10살 어린 배수지와 영화 속에서 동갑내기 연기를 선보일 만큼 '동안'을 자랑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남들보다 늦게 연기를 시작해 교복 입은 모습이나 대학생 이미지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나마 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웃음)" 그는 "이번 드라마 출연이 좋은 경험이자 큰 수확이었다. 다음 행보에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다"며 앞으로 브라운관 나들이에 자주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김명은 기자 dram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