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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54)를 언제나 따라 다니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라는 타이틀의 진정성은 꽉꽉 들어찬 그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코믹 오락물, 서스펜스 넘치는 스릴러, 절절한 드라마, 누와르부터 액션까지 모든 장르에 착 달라붙어 버리는 설경구의 변주에는 끝이 없다. 캐릭터의 리얼함을 위해 100kg을 증량하거나 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다. 노인 연기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올해 초 개봉한 '자산어보'(이준익 감독)는 그런 설경구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설경구의 첫 본격 사극 작품이자 첫 흑백 영화였다. 최근 대형 상업 영화에서 강렬하면서도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줬던 그가 오랜만에 어깨에 힘을 빼고 택한 저예산 작품이기도 했다. 설경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대형 상업 영화 사나리오 속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던 영화 '자산어보'에 마음을 빼앗겼고 출연을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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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는 무엇보다 미처 수상 소감에서 언급하지 못했던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류승룡, 조우진, 최원영 씨등 특별출연해 주신 분들의 이름을 무대 위에서 다 언급했으면서, 정작 우리 흑산도 주민들의 이름은 하지 못한 게 지금까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극중 아내였던 이정은 씨를 비롯해 민도희 씨, 차순배 씨에게 미처 감사의 말을 못했었는데 이렇게라도 말 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다. 그들에게 여러분 덕에 우리가 '자산어보'가 만들어 질 수 있었노라고 꼭 말하고 싶다"고 전했다.
청룡영화상 외에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하 영평상), 대한민국대학영화제, 황금촬영상, 한국제작가협회상에서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올해 5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쓴 설경구. 그는 '자산어보'를 통해 이토록 많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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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설경구는 인터뷰 내내 '자산어보'에서 스승과 제자로 호흡을 맞추고 함께 청룡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던 변요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사실 청룡에서 상을 안받은지 꽤 오래 됐다. '공공의 적'으로 상을 받고 19년이나 됐다. 청룡이라는 멋진 상. 솔직히 왜 나라고 받고 싶지 않았겠냐. 그래서 사실 요한이와 함께 받고 싶었다. 예전에 청룡영화상에서 '라디오스타'로 안성기·박중훈 선배님이 함께 공동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적이 있지 않는가. 나와 요한이가 그 뒤를 잇고 싶었다. 하지만 한 명만 받아야 한다면 그 주인공은 요한이가 되길 바랐다. 사실 청룡 전에 나는 영평상과 황금촬영상, 대학생분들이 주는 의미있는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래서 청룡에서만은 요한이가 받길 바랐다. 청룡에서 무대에서 요한이의 얼굴을 딱 보는데, 너무 미안하더라. 수상소감을 하다가 요한이의 눈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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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관람객과 평단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개봉해 많은 관객수를 모으지 못한 '자산어보'. 설경구는 자신의 수상으로 인해 '자산어보'라는 작품이 다시금 재조명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기뻤다고 전했다. "'자산어보'가 처음에는 접근이 쉬운 영화는 아니다. 사극인데다가 흑백 영화이니 어둡고 어려운 작품일 거라는 선입견이 생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정약용도 아니고 정약전이라는 다소 주목 받지 못했던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또한 생소했을 것이다. 나 또한 처음 이 시나리오를 받고는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 물고기 공부하는 책인 자산어보?'라고 의아해 했다. 하지만 대본을 보다가 눈물이 나왔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은, 정말 깊은 감동이 있는 작품이었다. 많은 관객이 극장서 영화를 보지 못하셨지만, 영화를 본 관객중에서 이 영화가 별로였다고 말하는 관객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자산어보'는 작지만 힘이 있는 영화다. 자칭타칭 설경구의 인생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박하사탕'과 견줘도 될 정도의 나의 새로운 인생작이라고 생각한다. 늦게라도 많은 분들이 꼭 봐주셨으면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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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청룡영화상 주연상 수상자 설경구와 문소리는 어느 해 보다 더 영화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영화 '오아시스'로 호흡을 맞췄던 설경구와 문소리('세자매')가 나란히 주연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로 잊지 못할 명연기를 선보였던 설경구와 문소리는 청룡영화상 백스테이지에서도 수상 이후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서로의 수상을 축하하기도 했다. 문소리의 이야기가 나오자 설경구는 "소리가 받아서 너무 좋았다. 내 수상 다음에 소리 수상이 이어졌는데, 소리가 받는걸 듣고는 축하해주기 위해 바로 내려가지 않았고 기다렸다가 축하해줬다. 소리도 청룡에서 상을 받는 게 정말 오랫만이라 정말 기뻐하더라"며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소리와 함께 수상하게 되다니, 나는 문소리랑 전도연에게 못 벗어나는 배우인가 보다"라며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자아냈다.
수상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축하를 해준 사람을 묻자 설경구는 "엄마"라고 답했다.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에 부모님에게도 시상식 참석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그는 "제가 시상식 간다는 말도 안해서 어머니가 그날 TV를 안보고 있었다. 제가 상을 받고 난 뒤에 어머니가 저의 누나에게 뒤늦게 제 수상 사실을 들었다고 하더라. 어머니가 그날 내 수상 장면을 본방송으로 보지 못한게 분하고 속상해서 이틀 동안 잠을 못주무셨다고 한다. 뒤늦게 휴대폰 다시보기로 보여드렸는데도, 축하한다는 말 대신에 계속 '속상하다'는 말만 하셨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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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를 시작했던 초반에는 상의 무게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저의 첫 주연상인 '송어'(박종원 감독)가 개봉하고 바로 도쿄영화제에 초청됐고, 그 다음 개봉했던 주연작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전수일 감독)가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됐다. 그 다음 개봉했던 '박하사탕'은 칸영화제를 비롯해 굉장히 많은 영화제와 영화상에 초청돼 상을 받았다. 주연작이 연이어 그렇게 되다보니 사실 모든 영화가 그런 줄 알았다. 영화가 개봉하면 영화제나 시상식에 가는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때 어떤 영화 시상식에서 만난 고 신성일 선생님께서 '너 또 왔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연기를 해오면서 시상식이나 영화제 추청된다는 게 당연한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얼마나 값지고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 '박하사탕' 이후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전쟁'으로 다시 칸에 초청받기 까지 16년이 걸렸다. 당연한게 아니었다. 청룡영화상에서도 '공공의 적' 이후 이렇게 다시 남우주연상을 받기까지 19년이 걸린거 아닌가.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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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미 기자 smlee0326@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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