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연구원 보고서, 노동생산성·고용률 등 '수렴 가설' 반박
"선진국 경험 단순 적용은 위험…고유 모델로 장기 전망해야"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 부르는 국가들의 과거 궤적이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는 신뢰할 만한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의 노동생산성과 남녀 고용 패턴이 결국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을 따라갈 것이라는 통념에 국책 연구기관이 통계적으로 '근거가 희박하다'는 분석을 내놓아 주목된다. 이는 국민연금 재정추계 등 국가의 장기 전망을 수립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5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국민연금연구원은 최근 공개한 '인구·경제변수의 수렴성 연구'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 노동생산성 ▲ 총요소생산성 ▲ 성별·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이 선진국 수준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수렴(convergence)'이란 경제 수준이 낮은 국가가 높은 국가보다 빠르게 성장해 장기적으로 서로 비슷해진다는 가설로, 많은 장기 전망의 기본 가정으로 쓰여왔다.
연구팀은 먼저 생산성의 핵심 지표인 노동생산성과 총요소생산성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우리나라의 생산성은 과거 주요 7개국(G7)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격차를 줄여온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노동생산성은 최근 일본을 추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착시'에 가까웠다. 보다 정밀한 시계열 분석 결과, 우리나라의 생산성은 G7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수렴하는 뚜렷한 경향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 일본과 일시적으로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관계가 사라진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팀은 "우리나라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며 "이는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취업자 수 증가율보다 더 빠르게 둔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연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성별·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 분석이다. 이는 기존 수렴성 연구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던 변수다.
분석 결과, 한국의 고용 구조는 선진국과 확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체 경제활동참가율 상승은 전적으로 여성의 참여 증가에 기인했으며, 남성은 오히려 소폭 하락했다. 결혼·출산·육아 등으로 여성이 노동시장을 이탈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M자형' 고용 곡선은 일본의 경우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 70세 이상 고령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은 OECD 최고 수준으로, 선진국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연구팀은 이런 한국의 독특한 고용 패턴이 과연 미국이나 일본의 과거를 따라 수렴할 것인지 검증했다. 결과는 '아니오'였다. 극히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남녀 연령대별 경제활동참가율은 미국이나 일본의 장기적인 추세와 같아질 것이라는 통계적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보고서는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선진국 사례를 장기 거시경제 전망에 단순히 차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자의 희망이나 주관적 기대를 담아 선진국 모델을 적용할 경우, 미래의 잠재적 위험을 과소평가해 정책 결정에 심각한 오류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론적으로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경제 및 인구 구조가 선진국과 다른 경로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며 객관적이고 검증된 국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신중한 전망 모델 수립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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