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마흔 살이 기다려지는 이유"

기사입력 2015-03-19 08:39


사진제공=나무엑터스

흔히들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 간다고 하는데, MBC '킬미 힐미'를 보면 드라마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첫 방송 한달 전까지도 주연배우 캐스팅 문제로 애태우더니 깜짝 놀랄 반전을 일궜다. 킬미(Kill me)와 힐미(Heal me) 사이, 다 죽어가던 이 드라마를 되살린 일등공신은 바로 지성이다.

다중인격장애를 지닌 1인 7역 연기. 지성의 원맨쇼였다. 온유하고 방어기제가 강한 주 인격 차도현, 폭력적인 성향의 옴므파탈 신세기, 풍류를 즐기는 전라도 사나이 페리박,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고교생 요섭, 그 반작용으로 생겨난 쌍둥이 여고생 천방지축 요나, 일곱 살 소녀 나나, 그리고 나나의 아버지 미스터엑스까지. 지성은 7개의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꿨다. 지성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던가. 너무 늦게 알아본 게 어쩐지 미안했다.

17일 저녁에 만난 지성은 "그저 배우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며 "이 작품을 하면서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가 정말 큰 힘이 됐다"고 덤덤하고 겸손하게 진심어린 인사를 건넸다.

지성은 한참 전에 우연히 '킬미 힐미' 시놉시스와 대본을 보고 '날 시켜주면 잘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스치듯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출연 제안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준비 시간이 워낙 부족해서 걱정도 많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선택과 집중을 더 잘할 수 있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버릴 건 과감히 버리고, 결과를 크게 기대하지 말고 편하게 연기하자고 생각했어요. 곧 마흔을 앞둔 배우가 언제 여자교복을 입어보겠으며, 언제 또 신세기처럼 아이라인을 그려보고, 또 페리박처럼 걸죽한 사투리 연기를 해보겠어요. 다만 캐릭터마다 각자의 진심을 어떻게 담아낼지 확실한 밑그림을 그려뒀습니다. 그래서 7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사진제공=나무엑터스
차도현이냐, 신세기냐, 그도 아니면 페리박이냐. 시청자들은 서로 다른 매력의 캐릭터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했다. 각각의 인격을 주인공으로 7개의 드라마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얘기도 나왔다. 지성도 "모든 캐릭터가 다 소중하고 의미 있어서 하나만 꼽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만큼 화제도 많았다. 신세기의 대사 '기억해, 내가 너에게 반한 시간'은 다양하게 패러디되고 있고, 핑크 교복 차림의 요나가 새침하게 입술에 바르던 틴트는 '완판'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모든 인격과 작별하고 돌아온 지금 이 순간, 지성이 떠올린 얼굴은 요섭이다.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던 요섭은 마지막 불어 대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나즈막히 읊조리며 소멸했다. "그 불어 대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연기할 때 눈물이 나더군요. 요섭이가 삶의 의지를 다진 것처럼, 이 드라마를 통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와 희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차도현의 다중인격장애는 아동학대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 7개의 인격들은 어린 시절의 폭력이 남긴 상처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킬미 힐미' 팬들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모으기도 했다. 회상신에서 학대당하던 장면을 연기한 아역들을 보며 눈물 흘린 일화를 소개하던 지성의 목소리가 살짝 잠긴다. "어린이집 구타 사건 같은 안 좋은 일들이 요즘 너무 많아요. 성인이 된다 해도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싶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아낌없이 사랑해줘야 할 존재예요. 우리 드라마가 단순한 재미나 시청률만 추구하지 않고, 좋은 메시지를 담았다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지성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야겠다고 또 한번 다짐한다. 그는 6월 말 세상에 나올 첫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빨리 아빠가 되고 싶은데 시간이 정말 안 가네요. 아이를 품에 안으면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아요." 아내 이보영은 요나가 홍대 거리를 명랑하게 질주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걸 몰래 보러왔다가 울컥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웃어도 아내는 웃을 수 없는 이유. 힘들게 일하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 때문이다.

"'킬미 힐미'를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웠고 저 또한 치유의 힘을 얻었어요. 저에겐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가 있잖아요. 제 삶이 이 드라마에 담긴 것 같아요. 20대보다 30대가 더 좋았고, 30대 막바지에 가족이 생겼어요. 40대엔 더 좋아질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들을 잘 지나온 저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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