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범-프랑스-악당, 삼위일체의 결정판 '나의 절친 악당들'

기사입력 2015-06-23 07:29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 류승범 인터뷰. 사진제공=이가영화사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 류승범 인터뷰. 사진제공=이가영화사

헐렁한 티셔츠와 시원스러운 맨발,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슬며시 흘러나오는 여유. 오랜만에 만난 배우 류승범은 세상을 표표히 떠도는 방랑자 같은 모습이다. 채식의 영향으로 살도 많이 빠졌다. 반항, 똘끼, 양아치, 힙스터 등 과거의 그의 이름 앞에 붙던 수식어들은 지금의 그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낸 듯, 그는 무척이나 가벼워 보인다.

류승범은 3년 전부터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다. 배우 류승범이 아니라 자연인 류승범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 류승범은 "'나'라는 사람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한국에 남겨둔 것들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다. "제 인생이 원래 그런 모양이에요." 철학자의 풍모까지 전해져 온다.

여행은 그의 삶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동안 내 안의 빈 공간을 사람을 통해서만 채우려 했어요. 그런데 요즘엔 자연에서 많은 걸 얻어요. 안정감과 깊이 같은 것들요. 삶에 대한 생각도 많아지죠. 예술이나 자연에서 느끼는 생경함, 그 낯섦이 전하는 감흥이 정말 크더군요."

지난해 여름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 촬영차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도 여행을 했다. "황당하리 만큼" 끝 없이 펼쳐진 사막의 지평선을 거닐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생경함, 살면서 처음 갖게 된 생각들, 사막에서 보낸 2주간의 시간이 이번 작품에 큰 도움이 됐어요."

류승범은 그간의 변화를 연기를 통해 이번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에 담아냈다. 메이크업을 안 한 본래 자신의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겉치레가 없어지니 캐릭터 안으로 들어가기도 수월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류승범이 연기한 지누는 마치 그의 분신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돈과 권력을 거머쥔 재벌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인턴' 지누. 우연히 수십억원이 들어 있는 돈가방을 손에 넣었지만, 그는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영화에선 그 돈을 펑펑 쓰지도 못했다. 대신 지누는 부패한 '슈퍼 갑'과 그런 갑에 기생해 사는 이들을 향해 통쾌한 한방을 날린다. 류승범은 시종일관 유쾌한 지누 캐릭터에 대해 "남자가 봐도 멋있더라"며 '무한 애정'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동경하고 그걸 쫓아가는 삶을 살잖아요. 그런데 지누는 그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 같았어요. 남에게 뽐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죠. 지누가 고시원의 작은 방에서 이런 대사를 해요.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대학 공부했지만 그래도 갚을 돈이 수천이야.' 지누는 이런 얘기도 웃으며 할 수 있는 친구죠. 현실은 갑갑하지만 컴플렉스도 없고, 사고방식이 꼬여 있지 않아요." 류승범은 지누로부터 긍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태도를 배웠다. "저는 누군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게 조금 서툴렀어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예전보다는 더 노력하는 편이죠."

류승범은 촬영을 하며 자신과의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그동안 연기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어떤 배우에게든 '연기하지 마라'는 말처럼 차가운 칼날은 없을 거예요. 이 영화는 그 칼날을 저 자신에게 스스로 들이밀었던 작품이에요. 연기로 발산하는 것보다 그걸 참아내는 데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죠. 그걸 해낸 거 같아서 저 자신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하녀', '돈의 맛' 등 여러 영화를 통해 자본과 권력을 통렬하게 조롱했던 임상수 감독과의 작업이란 점도 류승범이 이 영화를 택한 이유다. "상류사회를 바라보는 감독님의 시선이 재밌었어요. 감독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영화를 통해 돈을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감독님은 세상을 순환시키려는 분 같아요." 완성된 영화를 본 뒤 류승범은 임상수 감독에게 "뜨거운 동지애를 느낀다"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는 "99명이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나머지 1명의 목소리가 무시받아도 되는 건 아니지 않냐"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임상수 감독님은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말했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류승범의 연기 인생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만 그 변화는 천천히, 억지스럽지 않게, 느긋하게 진행될 것 같다. 3년간 달라진 그의 삶처럼 말이다. "제가 죽어도 영화는 남잖아요. 그 사실이 굉장히 무겁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하나의 의미를 찾게 됐어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세상에 던져보는 영화, 그래서 오래 남길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어요. '나의 절친 악당들'도 내 청춘을 기록해놓고 싶다는 의미가 컸죠. 그동안 빠르게 생각하고 빠르게 결정했다면, 이젠 오래 깊이 고민하면서 작업을 하고 싶네요."

인터뷰를 마치며 류승범에게 언제 파리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씩 웃으며 그가 답했다. "조만간, 곧." 언제 다시 돌아오느냐고 물었다. "지금 저의 상태론 제가 어떻게 흘러갈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이 네버 노(I never know)."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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