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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호주아시안컵 준우승 직후 "여러분,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 해도 됩니다"라는 슈틸리케의 어눌한 한국어에 열광했다.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무실점 8전승에 환호했다. '갓틸리케'로 칭송받았다. 매경기 속시원한 '사이다'골이 쏟아졌다. 9회 연속 월드컵행의 마지막 관문인 최종예선, 부진은 그래서 더 뼈아프다. 7경기에서 4승1무2패, 원정 3경기에서 1무2패를 기록했다. 이란, 중국 원정에서 패하며 깊은 부진에 빠졌다. '갓틸리케' 시절의 번뜩이던 경기력도, '홍명보호'의 끈끈한 응집력도 보이지 않는다. 90분 내내 속답답한 '고구마'축구, 도대체 무엇이 사라진 걸까.
▶측면 돌파의 실종
개인기와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활로를 찾는 기민한 모습이 사라졌다. 밀집수비로 중앙이 막히면 우회로를 찾아야 한다. 막힌 공격줄기를 영리하게 뚫어낸 후 킬패스를 연결하는 측면 공격수들이 실종됐다. 이재성, 이청용의 빈자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돌파도, 침투도 안되고 양질의 패스도 공급되지 않는데 골이 나올 리 없다. 시리아전에서 '원톱' 황희찬이 "50%밖에 못보여줬다"고 말한 이유다. 지난해 리우올림픽 대표팀에서 권창훈, 류승우, 문창진 등과 자리를 바꿔가며 수비진을 교란시키고, 역습에서 스피드와 파워로 상대를 밀어내는 황희찬 특유의 허슬플레이는 슈틸리케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최전방도 측면 돌파도 막혔을 때 해답은 '원샷원킬' 세트피스다. 날선 측면 크로스, 프리킥 한방은 경기 흐름을 바꿔놓는다. 최종예선에서 크로스의 질은 현저히 떨어진다. 수원 삼성의 염기훈처럼 궁할 때 '공격 옵션'으로 믿고 쓸 스페셜리스트가 없다. 개막후 전북에서 2경기 연속 포인트를 올리던 왼쪽 풀백 김진수도 시리아전에서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절친' 손흥민과의 시너지를 노렸지만, 손흥민의 말대로 "아쉬운 경기"였다. 약속된 플레이에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손발이 전혀 맞지 않았다.
▶지지않는 정신력의 실종
시리아전 직후 기성용(스완지시티)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등 고참 선수들은 작정한 듯 '정신력'을 이야기했다. 태극마크의 무게감에 대한 이야기다. 2011년 카타르아시안컵 당시 A대표팀은 '캡틴' 박지성을 중심으로 하나가 됐다. 구자철은 "나는 대표팀 유니폼의 의미를 선배들로부터 직접 배웠다. 그 기운을 받아서 지금껏 대표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감을 갖는 일이다. 나라를 대표하고 축구인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반드시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슈틸리케호의 하나된 정신이 흔들렸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발도 맞지 않는다. 최다 실점이다. 집중력이 흐려졌다. 패스미스도 빈발한다.
이들의 축구선배 이영표 해설위원은 시리아전 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최근 몇 년간 본 축구대표팀 경기중 최고의 경기였다"고 평했다. "마치 해방 이후 최악의 국가 상황에서 국민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국가대항전에 임했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축구 선배님들의 모습이 시리아 선수들을 통해 오버랩됐다. 오늘 우리 선수들은 11명의 시리아 선수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1700만명의 시리아 국민의 희망과 싸웠다." 후배들보다 훨씬 빛났던 시리아의 투혼을 향한 헌사였다. "한국은 승점 3점을 챙겼고, 시리아 국민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줬으니 최고의 경기"라는 돌려친 칭찬이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