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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충북경찰청의 한 공터.
청주에서 순찰차 전자장비 수리 업체를 운영하는 황동진(62)씨는 수리 중인 경광등의 나사를 조이며 활짝 웃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지칠 법도 하지만,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백발의 기술자는 섬세하면서도 노련한 손놀림으로 경광등을 손봤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세월이 빚은 그의 내공이 느껴졌다.
황씨는 "기계 만지는 걸 너무 좋아해서 그냥 손만 닿아도 웃음이 절로 난다"며 "천성이 지독한 일벌레라 별로 힘들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2023년 그는 34년간 몸담았던 경찰 조직을 떠났다.
현직 때는 장비 관리 분야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보냈다. 그의 솜씨는 다른 경찰서에서 지원 요청이 수시로 들어올 만큼 정평이 나 있었다.
"오지랖이 넓어서 밤늦게 전화가 와도 곧장 달려갔어요. 제가 안 해주면 외부에 맡겨야 하는데, 그게 다 세금이잖아요. 예산을 아꼈다는 걸 보람으로 삼으며 일했죠" 은퇴 후에도 그의 삶은 지루할 틈이 없다.
퇴직 직후 휴식기를 보내며 등산이나 가족사진 스캔 작업 등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로 계획표를 채워 나갔다.
하지만 이듬해인 지난해 4월, 고속도로순찰대에서 근무하는 옛 동료가 불쑥 연락을 해왔다.
황씨는 "그 후배가 갑자기 '형님 차 좀 고쳐주세요. 장비 갖고 계시잖아요?'라고 말하는 데 늘 해왔던 그 일이 어찌나 반갑던지 한달음에 달려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꼬박 사흘간 순찰차 20대의 전광판과 경광등을 손봤다. 수리비는 일절 받지 않았다.
은퇴 생활을 나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연장을 잡으니 가슴에 불이 지펴졌다.
그는 이후 불과 일주일 만에 전문 수리업체를 차렸다. 일사천리로 사무실과 장비를 구했고, 혼자서 작업할 수 있는 경광등을 주 업무로 삼았다.
성실했던 그의 현직 시절을 기억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이 퍼졌다.
그의 실력을 전해 들은 한 경광등 제조업체는 자사의 충북지역 무상보증수리 업무를 맡겼다.
지난 5월부터는 충남지역에서도 일감이 들어오고 있다.
"제가 맡기 전에는 수리를 마치는 데 1∼2주가량 걸렸대요. 그런데 저는 길어도 이틀이면 끝냅니다. 충청도에선 '황 반장에게 맡기면 다 된다'는 소문이 돌았더라고요. 머쓱했지만 기분은 최고였지요."
그에게 경광등 수리는 단순한 밥벌이 이상의 의미다. 경찰 조직과의 연결 고리가 다시 생겼다는 사실이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다.
황씨는 "한 파출소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낯선 파출소장이 뛰어나와 '선배님이 오셨는데 인사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배웅을 해준 적이 있었다"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신처럼 은퇴 후에도 보람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걸 안다고 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동료들을 마주할 때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불편하다.
"대다수 경찰관은 보안직 외엔 선택지가 없다"면서 "겨우 취업한 이들도 '수십 년 하던 야간근무를 또 해야 한다'며 한숨을 쉰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인데, 퇴직 후에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6일 경찰전직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직업 컨설팅을 받은 퇴직 경찰관 1천860명 중 1천435명이 재취업에 성공했지만, 대부분(88.8%) 비정규직인 데다 열에 여덟(77.7%)은 보안직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년퇴직자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어 재취업의 어려움은 갈수록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찰 정년 퇴직자 규모는 올해 2천759명에서 2029년 4천153명으로 4년 새 50.52%나 급증할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재취업 지원 예산은 2022년 23억1천300만원에서 동결됐다.
예산 부족은 부실한 재취업 연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현 예산으로 연간 교육 가능한 인원은 1천800명인데, 이는 올해 정년퇴직 예정자의 65.2% 수준에 그친다.
김영식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급증할 재취업 수요를 고려하면 예산 확대가 선행돼야 하며, 이를 통해 직업 개발 전문가를 영입하고, 퇴직 예정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직업교육을 시행하는 등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경찰전직지원센터는 사회적 자산인 경찰관들에게 단순히 보안직 위주 구직 정보만 기계적으로 제공할 게 아니라 각자의 업무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다양한 일자리가 매칭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며 "외부 전문 기관에 재취업 연계 업무를 위탁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chase_arete@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