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피겨여제' 김연아에겐 유명한 레전드 '짤(짧은 영상을 뜻하는 속어)'이 있다. '김연아 어록'으로도 회자된다. 스트레칭 훈련 중인 그녀에게 '무슨 생각 하면서 하세요?'라고 묻자 '풉' 웃으며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한다. 2~4일 서울 송파구 SK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리는 국제펜싱연맹(FIE) SK텔레콤 펜싱그랑프리(사브르)를 앞두고 열린 미디어데이에서 '펜싱황제' 오상욱(대전광역시청·세계 1위)을 만났다. 지난해 파리올림픽 개인, 단체 2관왕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등 세상의 모든 금메달을 다 가진 전무후무 '그랜드슬래머'에게 물었다. '목표를 다 이뤘는데 요즘은 무슨 생각하면서 운동하세요?' 오상욱이 답했다. "그냥 하는 거죠." '데자뷰'였다. "전에도 늘 그냥 해왔어요. 올림픽 시즌이라고 '더 빡세게' 이런 건 없어요. 매순간 매경기, 하루하루 그냥 해요." 잘되든 못되든 그냥 하는 것, 재밌어도 힘들어도, 누가 뭐래도 그냥 하는 것, 세계를 호령한 상위 0.001% '월클'의 길은 다른 듯 같았다.
오상욱은 파리올림픽 이후 재충전을 위해 올시즌 태극마크를 반납한 후 소속팀 대전시청에서 훈련중이다. 이번 대회도 대표팀이 아닌 실업팀 선수로 '파리올림픽 은메달' 파레스 페르자니(튀니지·세계 3위), '세계 2위' 세바스티앵 파트리스(프랑스) 등과 진검승부한다. 오상욱은 "대표팀은 아니지만, 똑같이 대한민국 대표선수의 마음으로 나왔다"며 결의를 다졌다. 올해 초 복귀전인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월드컵에서 바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탈리아 파도바 월드컵 동메달, 헝가리 부다페스트 월드컵 5위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쉬어가는 시즌에도 세계 1위를 지키는 데 대해 "사실 경기가 많이 없어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파리올림픽 금메달 포인트가 빠진 뒤에도 1위를 한다면 그때 정말 기쁠 것 같다"며 겸손한 소감을 전했다.
파리올림픽 후 방송, CF, 패션쇼 등 다양한 경험도 했다. 오로지 '그냥' 펜싱만 하던 오상욱은 처음으로 다양한 세상을 만나며 깊고 넓어졌다. 야구, 축구, 배구,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도 체험하고 직관했다. '대전 사람'인 그는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팬이다. 올 시즌 태극마크 반납 후 소속팀 대전시청서 훈련을 마치면 틈틈이 야구장을 찾는다. "잘하는 선수가 만루 찬스에 타석에 서면 다들 기대한다. 하지만 늘 잘하긴 어렵다. 욕하는 관중도 많다. 그런데 그 선수가 삼진 한번 당했다고 나쁜 선수가 되는 건 아니다. 그 타석이 끝이 아니다. 또 다음 타석이 온다. 홈런을 날릴수도 있다. 삼진 한번 당했다고 좋은 선수가 나쁜 선수가 되는 게 아니고, 1등 한번 했다고 인생이 바뀌는 게 아니다. 모든 건 다 과정일 뿐"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응원하는 경험 또한 난생 처음이었다. "관중석에 있어보니 팬 마음도 알겠더라. 팬들은 좋아하는 선수가 손 한번 흔들어주는 순간을 기다린다. 펜싱장에 오시는 팬들에게 쑥스러워 표현을 잘 못했는데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웃었다. '외도'를 통해 펜싱에 대한 확신은 더 강해겼다. "외도 아닌 외도를 하다보니 밖에 생활이 내게 잘 안 맞더라. 운동하고 먹고 자는 선수 인생이 가장 좋더라"며 미소 지었다.
아이치·나고야아시안게임이 열리는 다음 시즌엔 진천선수촌에 들어갈 계획이다. 대표팀 후배들이 '상욱이형'를 그리워한단 말에 오상욱은 "제가 있어 도움이 되는 것도 있겠지만 후배들이 독기를 더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충분히 재능 있는 후배들이다. 나도 하늘 같은 형들을 보고 배운 게 '독기'' 근성'이다. (김)정환이형이 나와 연습게임을 하다 뜻대로 안된다며 칼을 부러뜨린 적이 있다. 후배라고 져주거나 봐주는 법이 없었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 독기가 필요하다. (김)정환이형도 저렇게 절실하게 하는데 후배들은 선배들보다는 더 부딪치고 더 물고 늘어지고, 더 독하게 승부해야 한단 걸 배웠다"고 했다. "(박)상원이(세계 5위)도 이제 충분히 덤빌 순 있을 것같긴 한데, 내가 정환이형처럼 독하게 칼을 부러뜨리진 못할 것같다"며 싱긋 웃었다.
세상은 달라졌고, 길거리 사인공세가 일상인 자타공인 '우주스타'가 됐지만 오상욱의 마음은 처음과 다르지 않다. "원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다. 모자 쓰면 그냥 키큰 남자로 보일 것"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이날 미디어데이에 몰린 '구름 '취재진엔 오상욱도 깜짝 놀랐다. '오상욱 효과'를 실감한 페리자니의 '네가 우리 펜싱을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한마디가 더없이 뿌듯했다.
'만 28세' 올림픽 챔피언에겐 아직 많은 타석이 남아 있다. SK그랑프리에서 2019년, 2023년 우승했고 작년엔 8강서 탈락했다. 이번 대회도 '과정'일 뿐, 부담은 없다. '가족의 달' 5월, 더 많은 가족 팬들이 SKT그랑프리를 '직관'해주길 희망했다. "많이 오면 올수록 좋다. 엄마 아빠가 데려온 한 아이가 '나도 펜싱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 좋았다. 팬들을 위해 열심히 뛰는 건 당연하고, SK그랑프리를 통해 펜싱이 더 많이 알려지길, 더 많은 어린 선수들이 자라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