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영화 '히말라야'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함이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산을 오른 산악인의 발걸음처럼 겸허하게 산과 인간을 얘기한다. 대상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는 영화적 재미 이상의 가치를 획득하며 묵직한 감동으로 나아간다.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생을 마감한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 엄홍길 대장과 휴먼 원장대의 이야기.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댄싱퀸' 등에서 연출력을 빛낸 이석훈 감독이 실화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이석훈 감독의 연출에서 엄홍길 대장의 마음을 엿본다. 산과, 산을 오른 이들과, 산에 잠든 이들, 그리고 그 유족들까지, 어느 하나 마음 쓰지 않은 곳이 없다. 이석훈 감독은 "실화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 같다"면서 "주변에선 선악구도가 필요하지 않냐고 조언하기도 했지만 휴먼 원정대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재미를 추구하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엄홍길 대장과 가장 닮은 사람은 주인공 황정민이 아닌 이석훈 감독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적 재미만 생각했다면 엄홍길 대장의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 신화를 소재로 선택했을 게다. 하지만 이석훈 감독은 '개인의 위대함'이 아닌 '하나를 위한 전체의 희생과 헌신'에 주목했다. 더구나 이루고자 했던 목표엔 실패한 등반이라서 더욱 마음이 갔다. "휴먼 원정대의 등반은 애초에 불가능한 도전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간 거고, 또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해 힘겹게 결단을 내렸죠. 그들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가족과 동료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영화 속 휴먼 원정대에게선 우정과 동지애를 넘어선 일종의 연대의식까지 느껴진다. 엄홍길 대장과 후배 박무택(정우)의 관계가 중심을 이루지만 그 안에 주변인물들의 사연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낸 덕분에 휴먼 원정대의 희생은 한 단계 더 나아간 연대의 의미를 갖게 됐다.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시나리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도 한명씩 한명씩 휴먼 원정대에 모이는 장면이에요. 조금 구태의연하다고 해도, 각자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원정대에 동참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 캐릭터는 대부분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 관련 다큐와 책도 샅샅이 훑었다. 이석훈 감독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영화를 촬영하면서 뭉클해지는 순간이 많았다고 한다. 박무택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엄홍길이 박무택의 시신을 마주하는 장면, 여성산악인 조명애(라미란)가 엄홍길과 정상에 오른 장면 등을 떠올린 이석훈 감독은 "관객의 반응을 미리 계산할 수도 없고 경우의 수를 마련할 수도 없지만, 누구나 예상하는 감동이 아닌 여러 종류의 감동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해적'으로 시각효과 기술의 노하우를 쌓은 이석훈 감독은 무거운 촬영 장비를 메고 히말라야와 몽블랑과 한국의 강원도를 오가는 수개월의 원정 끝에 '히말라야'를 내놓았다. "훌륭한 스태프들과 힘을 합쳐 한국 산악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보자"는 굳은 결심은 진일보한 기술적 성취를 낳았다. 히말라야의 설산과 어마어마한 눈사태, 크레바스 등은 실사인지 CG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사실감이 넘친다. 매 순간이 난관이었지만, "일부러 더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에 도전했다"고 한다.
영화 속 엄홍길은 이렇게 말한다. "산에 올라가면 뭐 대단한 걸 찾을 것 같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건 나도 몰랐던 내 자신입니다." 이석훈 감독에게 대사를 빗대어 질문을 던졌다. 고난의 원정기 같았던 '히말라야'를 촬영하는 동안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발견했는지 말이다. "글쎄요. 우선 제가 영화 일을 무척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어요. 이 영화를 20개월 정도 작업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내 인생의 20개월이 정말 즐겁게 지나갔구나 싶어요. 그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도 알게 됐고요. 앞으로도 인생이 즐겁길 바란다면, 영화 안에서 즐거워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suzak@sportschosun.com·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