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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어쩔 수 없이, 나는 이렇게 살게 되어 있어."
박찬욱 감독이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작가의 1997년 발표작 소설 '액스'를 읽고 매료돼 20년간 영화화를 준비한 '어쩔수가없다'는 지난 2022년 개봉한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앞서 지난달 열린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진출해 월드 프리미어로 전 세계 최초 공개된 이후 아시아, 그리고 국내에서 부산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인 만큼 국내·외 취재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413석의 중극장도 모자라 212석의 소극장까지 객석이 가득 찬 '어쩔수가없다'의 이야기는 이렇다.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가 가장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만끽하기도 전 삶을 바친 회사로부터 덜컥 해고된 후 아내 미리(손예진)와 두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고 어렵게 장만한 자신이 태어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 준비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극한 상황을 그린 블랙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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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어쩔수가없다'의 모든 것인 만수 그 자체가 된 이병헌은 이번에도 '미친 연기'로 139분간 스크린을 씹어 삼키며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종잇밥을 25년간 먹으며 단 하루도 제지 아닌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올해의 펄프맨', 그리고 가족을 위해 헌신을 마다치 않는 만수 이병헌은 실직이라는 벼랑 끝에 몰리면서 외롭게 자신만의 전쟁을 이끌어 가는 장군의 처연하지만 또 비장한 그로테스크한 아이러니의 끝을 보인다. 만수가 매 순간 변하는 희로애락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표현한 이병헌은 왜 박찬욱 감독마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한 배우인지 입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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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과 손예진이 주축이 된 '어쩔수가없다'이지만 각각 이야기의 챕터를 담당하는 환상의 신 스틸러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의 일당백 열연도 빠질 수 없다. 만수가 재취업을 노리는 '문 제지'의 반장 선출 역의 박희순과 만수의 잠재적 경쟁자 범모 역의 이성민, 그리고 범모의 아내 아라 역의 염혜란은 그동안 본 적 없는 캐릭터로 충격을 안긴다. 특히 영화 중반부 만수에게 전환점이 되는 사건인 이병헌, 이성민, 염혜란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3인 난투극은 '어쩔수가없다'의 백미 중의 백미다. 진짜 차력쇼를 방불케한 세 사람의 액션은 우스꽝스러우면서 동시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기분을 선사한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노동자들의 실직이 늘어나는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는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땅에 발을 디딘 현실 고발 생존극으로 보는 이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책임감, 하지만 동시에 직업에 대한 장인의 광기 어린 집착을 담은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 전매특허인 통렬한 화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린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보게 만드는 '깐느 박'의 매직. '헤어질 결심'이 고품격 멜로의 정수였다면 '어쩔수가없다'는 처절한 생존극의 마스터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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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