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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특집]10년 새 바뀐 한국 축구 지형도 '박지성→기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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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국 축구는 빠른 측면 돌파에 의한 장신 포워드의 득점을 주 공격 루트로 삼았다. 덕분에 차범근 서정원 등 빠른 선수들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무대가 주어졌다. 경쟁력도 있었다. 그동안 유럽무대에 진출한 한국선수들의 대부분이 측면 공격수였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중앙 미드필더들이 뛰기에는 제한된 면이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을 기점으로 한국 축구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많은 스타들이 해외 무대를 노크했다. 이때도 성공시대를 연 건 대부분 측면 미드필더였다. 박지성(32·QPR)이 대표적이다. 박지성은 2002년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무대를 거치며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그는 '최초'의 사나이었다. 한국인 최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가 된 그는 유럽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선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코리안'이 됐다. 세계 최고의 클럽 맨유에서 7시즌 동안 활약하며 총 9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지난 10년간 한국 축구는 박지성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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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렀다.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그도 세월을 거스를 순 없었다. 박지성이 2011년 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한 이후 한국 축구의 무게 중심이 빠르게 이동했다. 한국 축구의 '뉴 아이콘'이 새롭게 자리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선수들이 그동안 개척하지 못했던 미지의 포지션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수비형 미드필더 기성용(24·스완지시티). 기성용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시대를 열면서 이제는 한국 출신의 중앙 미드필더도 유럽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했다. 기성용이 한국 축구의 지형도를 바꿔 놓았다.

한국 축구 중심축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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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에서 기성용으로 한국 축구의 중심이 넘어오기까지 또 한명의 스타가 잠시 '넘버 원'을 꿈꿨다. 2004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수비수 4명을 제치고 멋진 골을 쏘아 올리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박주영(28·셀타비고)이었다. 2005년 FC서울에서 프로에 데뷔한 그는 리그에서 12골을 쏘아 올리며 신인왕에 등극한 뒤 2009년 프랑스리그 AS모나코에 진출했다. 그는 2006년 독일월드컵, 2010년 남아공월드컵까지 한국 축구의 중심 공격수로 넘볼 수 없는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2011년 EPL 아스널에 진출하면서 그가 쌓아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벤치조차 지키지 못하며 경기 감각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병역 연기 논란으로 경기력보다 경기 외적인 이슈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2012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셀타 비고로 임대 이적하며 재기를 꿈꿨지만 그의 부활은 여전히 요원하다. 최근 최강희 A대표팀 감독은 박주영을 대표팀에서 제외하며 이동국(34·전북)을 중심으로 대표팀 공격진을 재편했다. 그 사이 기성용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SPL) 셀틱을 거쳐 한국인 10호 프리미어리거로 입성하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시련 딛고 성공시대 연 중원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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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 없었다면 오늘의 기성용도 없었다. 기성용은 2006년 FC서울에 입단한 뒤 고단한 2군 생활을 보냈다. 1군 경기에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며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2007년 세뇰 귀네슈 감독이 FC서울 사령탑에 부임하면서 새로운 축구 인생이 전개됐다. 넓은 시야와 자로 잰듯한 패싱력을 앞세워 단번에 서울의 중원 사령관으로 자리매김했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시즌 동안 80경기를 소화하며 K-리그에서 성공시대를 열었다. 2010년 1월 셀틱에 입단한 이후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공격력은 유럽 무대에서도 통했지만 수비력이 문제였다. 거친 유럽 축구에서는 '예쁜 축구'는 통하지 않았다. '반쪽 선수'라는 혹평과 함께 설 자리를 잃었다. 그의 반전 드라마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조기 귀국해 대표팀에 일찌감치 합류했다. 사실 이때 그는 이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의 남아공월드컵 16강 진출의 주역이 된 기성용은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셀틱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다. 그는 변신을 거듭했다. 몸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태클, 유럽 선수 못지 않은 피지컬을 앞세운 과격한 몸싸움에 셀틱 적응은 가속화됐다. 2011년 셀틱에서 맞이한 두 번째 시즌, 사실상 그는 셀틱의 '에이스'였다. 프리킥, 코너킥을 전담하는 것은 물론 공격형-수비형 미드필더, 좌우 날개 등 어느 포지션에 기용해도 제 역할을 해내는 '멀티플레이어'로 성장했다.

노력 없이는 이뤄내지 못할 결과였다. '반쪽 선수'라는 혹평을 지우기 위해 비시즌마다 산에 오르며 체력을 키웠다. '예쁜' 축구를 하던 기성용은 어느새 '거친 싸움닭'으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단점을 부단한 노력으로 극복한 그는 '반쪽 선수'에서 공수를 겸장한 한국 최고의 중원 사령관으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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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의 키(Key) 플레이어 기성용

더 큰 무대를 노크했다. 지난해 8월, 기성용은 박지성 이영표(전 토트넘) 설기현(전 레딩) 이동국(전 미들즈브러) 김두현(전 웨스트브로미치) 조원희(전 위건) 이청용(볼턴) 지동원(전 선덜랜드) 박주영(전 아스널)에 이은 한국인 10호 프리미어리거로 영국에 입성했다. 스완지시티로 이적하며 기록한 이적료는 600만파운드(이적 당시 109억원)였다. 박지성이 24세이던 2005년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에서 맨유로 이적할 당시 기록한 이적료, 400만파운드를 훌쩍 넘어섰다. 비슷한 나이의 박지성보다 기성용이 유럽 무대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10년 동안 박지성이 군림하던 유럽파의 꼭짓점을 기성용이 넘겨받은 순간이다.

스완지시티에서의 첫 시즌은 이전과 달랐다. 더이상 시련은 없었다. 다른 유럽파들이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강등권 탈출에 사활을 걸고 있는 사이 기성용은 팀의 주전으로 도약하며 2012~2013시즌 리그컵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유럽무대에 완벽히 적응했다. 더불어 유럽에서도 몇 안되는 장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각광 받았다. 한국인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유럽 무대에 당당히 섰다.

대표팀에서도 그는 빼 놓을 수 없는 중심 축이다. 한국 축구 사상 최초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2010년 남아공월드컵)과 최초의 올림픽 축구 메달 획득(2012년 런던올림픽) 등 2010년 이후 만들어진 굵직한 역사의 중심에는 늘 그가 있었다. 이후 대표팀 감독이 바뀌는 과정속에서도 기성용은 늘 제자리를 지켰다. 대표팀 소집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기성용의 합류 여부는 관심 밖이다. 오히려 기성용의 파트너가 누가 될 것인지, '퍼즐 맞추기'에 시선이 쏠린다. 만능키에 가깝다. 중앙 어디에 놓아도 제 몫 이상을 한다. 최강희호가 공격을 지향하면 기성용은 공격형 미드필더에, 강력한 수비를 원한다면 수비형 미드필더에 포진한다. 기성용의 포지션을 보면 최강희호의 기조가 보인다. 후임 감독이 누가됐건, 이후에도 기성용을 중심으로 대표팀이 꾸려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만 24세에 불과하다. 전성기가 이제 시작됐다. 한국 축구의 지형을 바꾼 기성용의 등장에 한국 축구는 더 큰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됐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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