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풍성해지려면, 자꾸 새로운 묘목을 심어 잎을 무성히 피워올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한창 자라나는 시기의 묘목들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칠 때 산의 붕괴를 지킬 힘이 부족하다. 바로 이런 시련의 때가 닥쳤을 때 산을 지키는 것은 결국 오랫동안 뿌리를 깊게 박고 있던 노송들이다.
오래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KIA의 베테랑 투수들이 마운드의 위기를 튼튼하게 지켜주고 있다. 현재 9개 구단을 통틀어 최고령 필승조인 최향남(42)-유동훈(36) 듀오가 바로 그들이다. 늘 조용히 덕아웃 뒤켠에서 후배 투수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위기의 순간이 오면 분연히 일어나 상대를 제압하고 있다.
10일 광주 두산전이야말로 이들 '최고령 필승조'의 힘이 제대로 발휘된 날이었다. 3-2로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던 KIA는 9회초 마지막 수비 때 아웃카운트 한 개를 남겨두고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다. 8회초 2사 후에 등판해 1⅓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던 마무리투수 앤서니가 마지막 순간 방심했는지, 두산 8번 양의지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양의지의 타구가 가운데 펜스를 넘어가는 순간, KIA 덕아웃은 침묵에 휩싸였다. 다행히 앤서니가 후속 고영민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이닝을 끝냈지만, 전날 역전패의 망령은 스물스물 KIA 덕아웃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순간 KIA 선동열 감독이 찾은 것은 팀내 최고령투수 최향남이었다. 이미 전날 박준표와 진해수, 이대환, 박경태 등 젊은 불펜진을 모두 가동했던 상황. 투수진 가운데에서는 최향남과 유동훈 등 베테랑들만이 아직 사용하지 않은 카드로 남아있었다. 그 두 명의 히든카드 중 선 감독이 먼저 빼든 것은 최향남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선 감독이 내놓을 수 있는 최강의 패였다. 만약 젊은 불펜진의 여력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팽팽한 상황 속이라면 선 감독은 가장 믿을 수 있는 패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 믿음의 대상은 현재 최향남과 유동훈이다.
결과적으로 선 감독의 선택은 적절했다. 최향남은 연장 10회초와 11회초, 2이닝을 단 1안타로 막아냈다. 특히 연장 11회초 이날 두산 4번타자로 출전한 홍성흔에게 바깥쪽 슬라이더로 연거푸 3개의 헛스윙을 이끌어내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어 연장 12회초에 바통을 이어받은 유동훈 역시 내야안타 1개만 내줬을 뿐 1이닝을 11개의 공만으로 무실점 처리했다. 결국 이 두 베테랑의 든든한 배짱투 덕분에 KIA는 연장 12회말 나지완의 끝내기 2루타로 4대3, 1점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선 감독은 과거 삼성 사령탑 시절부터 투타를 막론하고 젊은 선수들을 선호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빠른 세대교체가 결국은 팀을 강하게 만들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선 감독은 베테랑의 가치를 간과하지 않고 있었다. 세대교체도 좋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이라면 경험많은 선수들이 흔들리지 않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올해 KIA에서도 역시 이런 신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선 감독은 임준섭이나 박준표 등 신진 투수들의 성장에 크게 주목한다. 이들이 KIA의 미래를 책임져줘야 하고,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진짜 승부처에서는 최향남과 유동훈 등 베테랑 투수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침 최향남과 유동훈도 스프링캠프의 훈련을 잘 수행한 덕분에 마운드를 지킬만한 힘이 붙었다. 그래서 올 시즌 성적도 좋다. 유동훈은 4경기, 3⅓이닝 동안 4안타 무볼넷 4삼진으로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1승을 챙겼다. 최향남도 5경기에서 6이닝을 던지며 6안타 1볼넷 5삼진으로 1점만 내줬다. 평균자책점 1.50에 벌써 홀드를 3개나 챙긴 상황. 진정한 필승계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베테랑의 활약도가 계속 이어진다고 전제하면, KIA가 폭풍우 앞에 대책없이 무너지는 일은 드물 듯 하다.
광주=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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