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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별 것 아니야. 일어나." 기자는 허정무 감독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허 감독의 고성이 숨죽인 그라운드를 깨웠다. 그러나 왼무릎에 손을 갖다 댄 그는 허공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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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이었다. 경북 칠곡 왜관 출신인 한 멀리뛰기 선수가 축구를 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곽태휘였다. 그는 왜관중을 졸업한 뒤 왜관의 순심고에 입학했다. "중학교 축구부가 없다보니 대구와 경북 일원에서 선수를 육성해야 했다. 왜관에 아마추어 멀리뛰기 선수가 있다고 해 한 번 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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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 왼쪽 눈을 크게 다쳤다. 흐릿하게 보이는 실명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충주상고와의 경기였는데 태휘가 넘어졌다. 팔을 짚고 일어나는 순간 상대 선수가 킥한 볼이 그대로 눈을 강타했다. 서 있는 상태였다면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 충격은 더 컸다. 볼도 물을 머금고 있어서…"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결국 그는 눈을 치료하기 위해 휴학을 했다. 주위에선 다른 길을 모색하라고 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한 쪽 눈만으로 축구를 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또 흘렸다. 다행히 그는 다시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들이 3년 만에 끝을 내는 고등학교를 4년이나 다녔다.
말 못할 시련은 있었다. 고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라운드에서는 선후배가 없다. 타학교 후배들이 선배 대우는커녕 자존심을 건드렸다. "상담도 많이 했지만 그때 혼을 많이 냈다. 자신하고 싸워 이길 자신이 없으면 운동을 그만하라고 했다." 채찍이었지만 곽 부장도 마음속으로 울었다.
우여곡절 속에 또 성장했다. 오기로 무장했다. 곽 부장은 "그때부터 끝을 보려는 끈기는 누구도 못말렸다. 졸업 직전 울산에서 열린 전국체전 결승에서 울산 현대고와 맞붙었다. 아무래도 홈텃세가 작용한 것 같았다. 1-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곽태휘가 헤딩하는 순간 페널티킥이 주어졌다. 결국 승부차기에서 졌는데 태휘가 울면서 나오지를 않더라." 스승은 승부욕이 기특했다.
곽태휘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연세대, 고려대와 포항에서 영입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스승의 말을 따랐다. 중앙대를 거쳐 FC서울에 입단했다. 전남과 교토(일본), 울산, 알 샤밥(사우디아라비아)을 거쳐 알 힐랄에 안착했다. 곽 부장의 첫 제자인 신태용은 K-리그를 평정했지만 월드컵은 밟지 못했다. 곽태휘가 월드컵에 출전하는 첫 제자다. 스승의 바람대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공중볼 장악 능력과 노련한 경기 운영, 승부욕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감회를 묻자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자식이다. "월드컵대표팀에 뽑혀도 걱정은 뭐냐면, 혹시 연습과정에서 또 남아공처럼 그런 상황이 연출되면 안되는데 하는 것이다. 걱정반, 두려움반, 기쁨반이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단 5분을 뛰든, 10분을 뛰든 주어진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량만 발휘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이도 있고, 젊은 선수들도 많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부끄럽지 않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왼쪽 눈 실명 이후에 어깨, 허리, 무릎, 발목 등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오뚝이' 인생은 여기까지 왔다. 스승의 품은 따뜻했다. 곽태휘의 영화같은 스토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인 브라질이 클라이맥스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