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플레잉 게임(RPG)은 전체 게임시장에서 언제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조금 과장한다면, 시대와 기종을 초월해 언제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온 거의 유일한 컴퓨터 게임 장르라 말할 수 있다. 초창기 콘솔부터 90년대 PC게임의 황금기를 거쳐 21세기의 온라인 게임 열풍까지, 롤플레잉 게임은 언제나 게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이 롤플레잉 게임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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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조: '반지의 제왕'과 '던전 앤 드래곤'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 이전까지 롤플레잉 게임은 곧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Tabletop Role-Playing Game 혹은 Table-talk Role-Playing Game, 줄여서 TRPG)을 뜻했다.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이란, 일정한 룰북을 가지고 테이블에 여러 명이 모여 펜과 종이, 주사위로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의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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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롤플레잉 게임의 가장 먼 기원은 18세기 귀족들이 즐기던 워게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체스의 영향을 받아 군대를 지휘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전략게임이었던 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각자 '역할'(Role)을 맡는 방식이 첨가되었다. 이것이 워게임의 상징인 주사위(Dice)와 함께 TRPG에 큰 영향을 준다.
던전앤드래곤 클래식. 90년대 말에 한국에 정식 출간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의미의 롤플레잉 게임은 1974년 출간 된 '던전 앤 드래곤'(Dungeons & Dragons)를 그 시초로 본다. 당대 유행하던 워게임의 최신형태에 동서양의 각종 신화와 인기 있는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을 혼합해 하나의 롤플레잉 룰북(Rule book)인 '던전 앤 드래곤'으로 정립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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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앤 드래곤'은 판타지 소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특히 1954년 출간된 J.R.R.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제작자인 게리 가이각스(Ernest Gary Gygax, 1938~2008)는 '반지의 제왕'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며 부정했지만, '반지의 제왕'에 사용된 개념은 물론 몇몇 용어가 그대로 룰북에 들어있었다.
예를 들면 난쟁이 종족인 '호빗'(hobbit)이나 '엘프'(elf)라는 종족을 날씬하고 아름다우며 오래 사는 종족으로 규정한 개념이 그렇다. '반지의 제왕'에서 그대로 가져온 호빗 등의 용어는 이후 저작권 분쟁 때문에 '던전앤드래곤'의 오리지널 용어로 (호빗은 하플링으로) 대체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판타지 소설이 '던전 앤 드래곤'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다시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먼 조상이다.
최초의 시도, '로그'
'던전 앤 드래곤'은 대성공을 거두며 롤플레잉 게임 장르의 서막을 열었다. 이 '던전 앤 드래곤'의 성공에 힘입어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까지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은 독자적인 취미 영역을 형성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하며 롤플레잉 게임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Zork'의 모습. 보다시피 명령어를 직접 타자로 치는 방식이었다.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시작은 당연히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TRPG)을 컴퓨터로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초창기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은 아직 타 장르와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던전 앤 드래곤'에 큰 영향을 받아 '조크'(Zork, 1976)등의 게임이 등장했지만 이들은 아직 명령어를 쳐서 탐험하는 텍스트 어드벤처의 단계에 있었고 본격적인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은 몇 년이 더 지나야 했다.
1980년에는 '로그'(Rouge)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로그'는 TRPG에서 던전 탐험 부분만 따와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방식의 게임으로 구현했다. 캐릭터를 조종해 몬스터를 물리치고 던전에 있는 보물을 찾아 빠져나가는 단순한 방식이었지만, RPG를 간단히 즐길 수 있고 게임을 저장할 수 없다는 특이한 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아스키문자로 구현한 Rouge. 이 정도도 대단한 것이었다.
'로그'의 가장 큰 의의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에 본격적으로 그래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비록 아스키 부호를 사용한 조악한 방식의 그래픽이었지만, '로그'가 롤플레잉 게임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2D 화면에서 내 캐릭터를 움직여서 던전을 탐험하는 기본적인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방식이 바로 이 '로그'에서 출발했다.
'로그' 이후 많은 개발자들이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 제작에 뛰어들게 된 만큼, 이 게임이야 말로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시대를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 게임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로그'로 꼽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앞서 설명한 '로그' 특유의 게임방식은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과는 다른 '로그라이크'(Roguelike)라는 개별 게임 장르를 만들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로그라이크 장르는 여전히 즐기는 사람이 많다. 국내에서 로그라이크 게임 중 가장 인기가 높은 돌죽(Stoneso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