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는 흑단같이 까만 머릿결에 흰 눈처럼 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딸을 낳았고 아이 이름을 백설 공주라 지었다."
그림 형제 동화집에 나오는 '백설 공주' 한 대목이다.
'백설 공주'는 착하고 어여쁜 공주가 사악한 계모 왕비의 살해 위협을 이겨내고 왕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담은 고전 동화다.
디즈니는 1937년 그림 형제의 '백설 공주' 원전에 등장하는 일부 잔혹한 묘사를 덜어내고 각색을 거쳐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라는 근사한 만화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디즈니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디즈니의 자존심과도 같은 '백설 공주'는 최근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화제가 됐다. '백설 공주'를 실사 영화로 다시 제작하기로 하면서 주인공에 라틴계 신예 레이철 제글러를 기용했기 때문이다.
제글러는 콜롬비아 출신의 어머니를 둔 신인 배우다.
17살 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리메이크 뮤지컬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오디션에서 빼어난 가창력을 선보이며 경쟁자 3만여 명을 물리치고 여주인공으로 선발된 실력파다.
앞서 디즈니는 지난 3월 개봉한 신작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선 동남아시아 공주를 등장시켰고, '백설 공주'와 마찬가지로 실사 영화로 제작되는 '인어 공주' 주인공에는 흑인 가수 핼리 베일리를 낙점했다.
글로벌 팬들을 고려해 포용성과 다양성을 강조함으로써 '디즈니 프린세스' 세계관을 넓히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라티노 '백설 공주'의 탄생에 대다수 팬은 환영했으나 소셜미디어 일각에선 볼멘소리도 나왔다. '백설 공주'는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https://youtu.be/8tzj59X4JWo]
일부 미국 누리꾼은 인종차별 발언과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백인 우월주의자, 네오나치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소셜미디어 '갭'에선 "디즈니가 백설 공주를 블랙 걸(black girl)로 만들었다", "제글러는 하얗게 보이지 않는다", "백인에 반대하는 헛소리"라는 공격이 이어졌다.
혐오 공격이 도를 넘자 제글러는 자신의 정체성을 라티노 백설 공주로 규정하며 '눈처럼 하얀 피부'를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트위터에 "그렇다. 나는 백설 공주다. 하지만 그 역할을 위해 내 피부까지 표백하지는 않겠다"고 썼다.
다만, 제글러는 그 트윗을 지웠다. 극단주의적 주장에 괜한 논란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사실 '백설 공주'는 그동안 영화와 애니메이션, 문학 작품에서 수많은 재해석이 이뤄졌다. 캐릭터도 진화를 거듭하며 여전사의 성격이 가미되거나 스페인의 여성 투우사 역할로 그려진 작품도 있다.
장르 면에서도 시고니 위버가 마녀 왕비로 등장하는 공포영화 '스노우 화이트: 테일 오브 테러'(1997)가 있는가 하면 2012년에는 판타지 장르 '스노우 화이트 앤드 더 헌츠맨', 로맨틱 코미디가 가미된 '백설 공주'(원제 '미러 미러')도 개봉됐다.
스페인 최고 권위의 영화상 고야상을 휩쓴 영화 '백설 공주의 마지막 키스'(2012)는 무성영화 형식에 잔혹 동화적인 내용을 담아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한국에선 '백설 공주'(1964)라는 제목으로 전통 사극 형식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당대 최고 여배우 김지미와 도금봉이 각각 백설 공주와 계모 왕비를 연기했다.
이렇듯 '백설 공주' 변천사를 살펴보면 라틴계 '백설 공주'에 이질감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평가해야 할 것은 라틴계 '백설 공주'의 등장이라는 겉 포장이 아니라 완성된 실사 영화의 작품성일 것이다.
'백설 공주'가 수록된 그림 형제 동화집은 1812년 발간됐다. 내년이면 '백설 공주' 탄생 210주년이다.
'백설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이야기 같지만, 목숨이 걸린 공주와 계모의 긴장 관계, 마법의 거울과 일곱 난쟁이, 독 사과 등의 상징은 동화의 틀로 묶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의 확장력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시도되는 '백설 공주'의 재해석과 캐릭터의 변주는 매혹적인 원전 동화의 생명력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jamin7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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