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민

기사입력 2012-04-24 21:56


윤석민의 패기는 박찬호의 관록에 휘말렸고, 박찬호의 관록은 이용규의 끈질김에 무너졌다.

지난해 투수 3관왕과 정규시즌 MVP에 빛나는 당대 최고 에이스와 메이저리그 아시아투수 최다승(124승)을 달성한 왕년의 대투수가 펼친 첫 맞대결은 결국 무승부로 결말이 났다. 마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연상되는 경기였다. 시즌 초 최고의 빅매치로 관심을 불러모았던 이 경기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KIA 윤석민과 한화 박찬호는 24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맞대결에서 각각 5이닝 7안타(1홈런) 1볼넷 8삼진 5실점과 4이닝 5안타 6볼넷 3삼진 4실점(1자책)을 기록하며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윤석민이나 박찬호나 제구가 흔들렸다. 박찬호는 승리를 목전에 뒀지만, 투구수의 한계를 넘지 못한 끝에 결국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이날 경기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묘한 역학관계가 눈에 띈다. 이날 선발인 윤석민과 박찬호, 그리고 또 다른 변수인 KIA 톱타자 이용규가 '물고 물리는' 역학관계를 형성하며 경기 내용을 복잡하게 만들어갔다. 그들이 빚어낸 역학관계의 삼중주를 들어보자.

박찬호를 지나치게 의식한 윤석민의 자충수

이날 경기를 앞두고 KIA 선동열 감독은 윤석민과 박찬호에 대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선 감독이 '비교 불가' 판정을 내린 이유는 두 투수의 레벨이 차이나서가 아니라 '연식'이 달라서였다. 선 감독은 "두 선수의 연배가 너무 차이나서 현재를 기준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박찬호가 지금도 좋지만, 윤석민 나이 때는 얼마나 잘 던졌나"라며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윤석민에게 '박찬호'는 반드시 넘어서고 싶은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유난히 삼진을 의식하거나 타자와의 승부를 서두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2경기에서 평균자책점 0.55에 25삼진을 잡는 동안 볼넷을 단 2개 밖에 허용하지 않았던 윤석민의 '핀포인트 제구력'은 무너졌다.

1회초 한화 선두타자 강동우와 6구 승부끝에 삼진을 잡아낸 윤석민은 3회까지 무려 6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나머지 아웃카운트 3개는 외야 뜬공과 직선타, 오버런에 따른 베이스터치였다. 차분하게 타자를 땅볼로 유도해내는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이전 2경기에서 윤석민의 땅볼/뜬공 비율은 0.56으로 삼진을 제외한 아웃 가운데 둘 중 하나는 땅볼로 처리했었다. 그러나 이날 3회까지 땅볼 아웃이 한 개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곧 편안하게 맞혀 잡는 것보다 힘으로 이기려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4회초 1사 만루에서 이대수에게 주자일소 3루타를 맞을 때도 볼카운트 1B1S에서 3구째에 너무 빠르게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다 한가운데로 몰리는 실투를 하는 장면에서도 윤석민의 조급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중계화면에 잡힌 윤석민은 공을 던질 때 유난히 이를 악물고 눈을 거의 감다시피 했다. 상대투수 박찬호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다 '오버페이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커트의 달인',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를 침몰시켰다.

이렇게 윤석민이 박찬호에게 '말렸다'면 박찬호 역시 천적을 만나 무릎을 꿇고 말았다. 바로 '커트의 달인' 이용규의 끈질긴 승부에 에너지가 방전되고 만 것이다.

박찬호는 지난 2경기에서 명확한 한계점을 드러냈다. 바로 투구수 90개의 벽이다. 80개 이전까지는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다운 관록을 자랑했지만, 80개를 기점으로 서서히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90개에 가까워오면 꼭 연속 안타나 실점을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박찬호의 숙제는 얼마나 적은 공을 던지면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느냐였다. 하지만, 이용규의 끈질긴 승부는 박찬호의 그러한 계획을 붕괴시켰다. 이날 이용규는 1회말 첫 타석에서 4구만에 중견수 뜬공을 기록했다. 이어 2회에는 박찬호와 7구 승부끝에 좌전안타를 날렸다. 그리고 4회 타석 때는 무려 8구까지 가능 승부끝에 볼넷으로 출루했다. 사실상 4회 이용규에게 8개의 공을 던진 시점에서 박찬호의 투구수는 81개가 됐고, 에너지는 방전됐다. 이용규를 내보낸 뒤 박찬호는 김선빈에게 1S 뒤 연속 볼 4개를 던지는데 힘이 떨어지다보니 제구가 안된 것이다.

이어 87개로 4이닝을 마친 박찬호는 5회가 되면서 90개의 벽을 만나자 급격히 제구가 흔들렸다. 결국 선두타자 최희섭에게 안타에 이어 후속 나지완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팀이 5-2로 앞서던 상황이다. 아웃카운트 3개만 더 잡으면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었지만, 박찬호는 끝내 마의 '투구수 90개의 벽'을 넘지 못해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날 박찬호의 투구수는 96개. 그 가운데 이용규 한 타자에게만 무려 19개의 공을 던지고 말았다. 총 투구수의 19.8%를 소비한 것이다. 이용규의 커트 본능은 결국 박찬호에게는 천적으로 입증됐다.


광주=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Copyright (c) 스포츠조선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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