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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벤자민. 예스터데이 아임 소리. 코치 사인."
넥센의 4번타자 박병호가 14일 경기 전 LG 주키치에게 한 말이다. 원정팀이 쓰는 3루 덕아웃 안쪽에 있는 잠실구장 LG 라커룸의 특성상 경기 시작 전 LG 선수들은 원정팀 선수들과 덕아웃 앞 복도에서 마주칠 수 밖에 없다. 1루 덕아웃으로 향하다 친한 선수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주고 받는 게 일상이다. 그라운드에서는 적일지라도 모두 함께 뛰는 동업자임을 알 수 있는 독특한 장면이다.
통산 11도루 박병호, 모든 이의 혼을 쏙 빼놓다
박병호는 13일 잠실 LG전에서 사실상 승리의 주역이었다. 기록은 좋지 못했다. 3타수 무안타. 볼넷 2개를 골라나가 2득점을 올리긴 했지만, '히어로'라고 꼽을 만한 활약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3회초 보여준 그의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은 LG의 연패를 끊기 위해 나온 에이스 주키치를 강하게 흔들었다.
박병호는 1사 후 볼넷을 골라 출루했다. 주키치는 1회부터 자신이 범한 번트타구 판단 미스로 인해 정신적으로 데미지를 입고, 투구 밸런스가 흐트러져 있던 상황이었다. 이택근을 유격수 앞 땅볼로 잡아내지만, 다시 박병호에게 볼넷을 허용했다. 제구가 되지 않았고, 무슨 일인지 포수 김태군과도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박병호는 볼넷을 골라내면서도 그 공이 뒤로 빠지자 1루까지 전력으로 뛰었다. 아마 이때부터 직감했을 수 있다. 코치의 사인이 나올 것이란 것을. 이후 박병호는 LG의 이대형 부럽지 않은 '발야구'를 선보였다. 지난해까지 5시즌 동안 박병호의 도루는 단 11개였다.
박병호는 강정호와 상대하던 주키치의 초구에 2루를 훔쳤고, 스트레이트 볼넷을 얻어낸 4구째 3루 도루에 성공했다. 허를 찌른 박병호의 발에 주키치와 김태군 모두 혼이 쏙 빠졌다. 주자를 견제하겠다는 사인도 나오지 못했고, 공은 계속해서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났다.
이어진 오 윤의 1타점 적시타와 유한준의 좌익수 희생플라이. 주키치는 5점째를 내주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2⅔이닝은 주키치의 국내무대 데뷔 후 선발로서 최소이닝 투구였다. '연패 스토퍼'는 그렇게 허무하게 고개를 숙였다. 박병호의 발이 경기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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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뒤인 14일 잠실구장. 김시진 감독은 박병호의 연속 도루에 자신도 놀랐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아마 여러 사람 놀랐을 것이다. 투수와 포수, 상대 벤치, 관중. 나도 놀랬다. 2루 뛸 때 '어' 하게 하더니, 3루 뛸 때 또 '억' 하게 만들더라"며 웃었다.
김 감독은 주루 부분은 염경엽 주루·작전 코치의 소관이라며 자신이 주문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는 "나도 그런 주문을 하지만, 염경엽 주루코치가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며 "발이 느려도 투수가 견제하고 투구하는 타이밍만 알아채면, 언제든 뛸 수 있다. 어제 병호가 그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사실 이날 박병호의 깜짝 도루는 상대가 LG인데다 투수가 주키치였기에 가능했다. 염 코치와 박병호 모두 지난해 LG에 몸담았기에 투구와 견제 시 미묘하게 다른 주키치의 쿠세(습관을 뜻하는 야구계 은어)를 파악했을 수 있다. 왼손투수인데다 평소 퀵모션이 좋은 주키치지만 이날 1회부터 정신적으로 흔들렸음을 감안하면, 과거 쿠세가 나왔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또한 투구 밸런스가 무너진 탓에 배터리가 함께 주자를 신경쓰지 못할 것을 간파한 염 코치의 자신감 있는 주문이었다.
김 감독의 말대로 넥센은 올시즌 적극적으로 '뛰는 야구'를 펼치고 있다. 14일 현재 팀 도루 103개로 독보적 1위다. 2위 LG가 90개고, 최하위 SK는 40개에 불과하다. 지난해와는 확 달라진 모습이다. 지난해 넥센은 팀 도루 99개로 이 부문 꼴찌였다. 유일하게 100개를 넘지 못한 팀이었다. 지난해엔 삼성이 158개로 팀 도루 1위를 했는데, 지금 넥센의 페이스면 산술적으로 삼성보다 많은 182개가 가능하다.
올시즌 넥센에는 두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선수가 무려 5명에 이른다. 여기에 발이 빠른 편이 아닌 박병호가 7도루로 뒤를 잇고 있다. 박병호는 한 시즌 개인 통산 최다 도루 기록을 작성중이다. 최경철 지재옥 등 발이 느린 포수도 도루가 있을 정도다. 조금의 틈만 보이면 도루 사인이 나온다. 게다가 그린라이트인 선수가 라인업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김 감독은 "죽든 살든 뛰어봐야 안다. 이번엔 왜 살았는지, 왜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 시도조차 안하면 계속 모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시즌 넥센의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정리하는 말이었다.
하위팀이라는 패배의식과 두려움을 떨쳐내는 게 올시즌 넥센의 당면과제였다. 이 목표는 벌써 해결된 듯 하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만들어낸 '용감한' 주루플레이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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