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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4구는 투수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끝판대장'에게도 통하는 말일까.
고의4구, 투수의 마음속엔 '내 탓 아니오'
류 감독은 일단 고의4구가 나올 때 투수는 책임에서 비켜갈 수 있다고 했다. 벤치의 '거르라'는 지시 이후 나온 실점이기 때문이다. 투수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평균자책점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벤치 지시였잖아'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벤치에서 고의4구 사인이 나왔을 때 투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오승환은 얼마 전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팀이 이기기 위한 것이니 별 느낌은 없다. '굳이 거르지 않아도 되는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다른 투수들도 자존심에 상처를 받기 보다는 '좀더 집중하자'는 생각이 앞선다고 한다.
물론 앞선 투수가 주자를 2루에 남겨둔 상황에서 강판되고 등판하자마자 자신에게 고의4구를 지시했을 경우, '왜 고의4구까지 나한테 시키지'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 그 주자가 득점할 경우, 자책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고의4구는 자신의 만든 위기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벤치의 고육지책이다. 그렇기에 불만없이 벤치의 지시에 따른다.
하지만 류 감독은 투수들이 말로 표현하지 않는 내면을 보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방어 기제'가 작용하는 것이다. '벤치 사인이었으니까 실점이 나와도 어쩔 수 없어. 난 괜찮아.' 류 감독은 이런 생각이 습관화되는 순간, 발전은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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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까지 단단할 것 같은 오승환은 어떨까. 류 감독은 "다른 투수들처럼 고의4구 이후 실점에 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내 "고의4구가 안좋은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있더라"고 말했다.
시즌 초반, 천하의 오승환이 6실점하며 무너졌다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지난 4월24일 대구 롯데전. 오승환은 2점차 리드를 지키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6실점하며 한 경기 개인 최다 실점의 불명예기록까지 떠안았다. 1점차로 쫓긴 뒤 맞은 2사 2루 상황에서 오승환은 롯데 좌타자 손아섭을 고의4구로 걸렀다. 이후 오승환은 아웃카운트를 잡지 못하고 난타당했다.
손아섭은 오승환에게 2008년 안타 1개를 기록한 뒤로 아직까지 안타를 치지 못했다. 굳이 거르지 않더라도 승부해볼 만 했던 카드였다. 물론 벤치는 8번, 9번타자로 이어지는 하위타순임을 감안했겠지만, 기대와 달리 오승환은 고의4구 이후 허망하게 무너졌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패턴으로 간 탓에 흔들렸을 수 있다.
류 감독은 전반기 마지막 경기였던 19일 대전 한화전을 논하며, 오승환과 고의4구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끈질기게 따라붙어 동점이 된 9회말, 1사 2루 위기를 맞자 류 감독은 오승환을 등판시켰다. 연장 승부를 포석에 둔 등판. 오승환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투수 강습안타를 맞고 1,3루 위기를 맞았다.
타석엔 이날 3점홈런에 멀티히트로 맹타를 휘두르던 이대수가 들어섰다. 대기 타석엔 신고선수 출신 신인 포수 이준수. 1루를 채워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오승환은 정면 승부를 택했고, 이대수와 이준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연장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
사실 류 감독은 이대수 타석 때 고의4구 사인을 낼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류 감독은 "내 판단이 조금 늦었다. 6실점한 일도 있고 해서 멈칫 했다. 그 순간 포수 이지영이 그냥 초구를 받아버리더라"며 "만약 이지영이 벤치를 한 번 봤다면, 고의4구 사인을 낼 수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만약 이대수한테 맞고 졌으면, 며칠 동안 잠도 못 잘 뻔 했다. 그런데 이지영과 오승환의 판단이 통했다"고 덧붙였다.
고의4구를 두고 갈린 극명한 결과. 만약 이와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면 어떨까. 류 감독은 "투수 코치랑도 이걸 갖고 얘기했다. 둘 다 '그땐 좀더 고민해보자'는 의견이었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같은 상황이 또 왔을 때, 삼성 벤치의 선택을 어떨까. 류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 같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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