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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환하게 켜져 있을 것 같았던 거인의 '그린라이트'가 꺼진 지 오래다.
감독조차 자기 팀의 선수가 언제 뛸 지 미리 알 수 없으니 상대 배터리나 내야진은 더 도루 타이밍을 잡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사인도 없이 불쑥 뛰는 선수가 누상에 나오면 상대 배터리와 내야 수비진의 긴장도는 월등히 커진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빠른 주자가 굳이 뛰지 않고 '언제든 뛸 수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만으로도 또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바로 타자에 대한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배터리나 수비진이 주자쪽으로 신경을 분산시키면 그만큼 타자는 유리한 입장에서 승부할 수 있다.
그래서 프로팀 감독들은 발이 빠르고 주루 센스가 있는 타자들에게는 되도록 '그린 라이트'를 폭넓게 허용하는 편이다. 롯데 양승호 감독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올해 롯데는 총 172회의 도루를 시도해 119번 성공했다. 시도 횟수는 전체 6위이고, 성공 횟수는 전체 5위다. 시도와 성공 모두 썩 많지는 않았는데, 성공확률은 69%로 평이한 수준이다. 하지만 양 감독은 시즌 내내 선수들에게 알아서 뛰라고 믿고 맡겼다.
물론 아무리 그린라이트가 켜져있다고 해도 아무 때나 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함부로 뛰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올해 포스트시즌에서의 롯데는 그린라이트를 갖고 있는 선수들이 기회를 엿본다기 보다는 아예 라이트의 배터리를 빼놓았다.
이유는 하나다. 적어도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만큼은 양 감독이 거의 전권을 행사하며 선수들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양 감독은 준플레이오프 승리 후 "선수들을 믿고 맡기는 것보다 벤치가 먼저 움직여주는 게 오히려 선수들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결국 정규시즌이라면 알아서 하도록, 그래서 밥이 되든 죽이 되든 그 결과를 수용하던 양 감독이 올 가을에는 승리를 위해 먼저 나선 것이다.
확실히 이 덕분에 올 가을의 롯데는 한층 정교하고, 뒷심이 강한 야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의 허를 찌르는 맛은 사라졌다. 경기를 지켜보다가 무릎을 칠 만한 예상밖의 장면도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문제는 늘 계획대로만 경기가 풀리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때로는 과감하고 무모해보이는 시도가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SK 벤치가 '롯데 주자는 뛰지 않는다'고 생각을 굳혀갈 때쯤 나오는 기습 도루는 충분히 상황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카드가 될 수 있다. 롯데의 그린라이트가 언제 또 켜질 지 주목되는 이유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