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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중고 신인왕'으로 최형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오프시즌 FA(자유계약선수) 신분으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 최형우는 2002년 신인 드래프트 2차 6라운드 48순위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그가 신인왕을 차지한 것은 입단 후 6년이 지난 2008년이었다. 그는 그 사이 경찰야구단 등 2군서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다. 전주고를 졸업한 최형우는 큰 주목을 받은 선수는 아니었다. 2군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기량을 갈고닦아 고난의 시간을 신인왕으로 보상받은 것이다. 입단 계약금이 5000만원에 불과했던 최형우는 이제 4년간 100억원을 받는 스포츠 재벌이 됐다.
또 하나는 기회의 측면이다. 최형우가 입단했을 때 삼성은 최강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삼성은 2002년, 2005~2006년 세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타선에는 양준혁 마해영 이승엽 진갑용 심정수 등 거포들이 즐비했다. 최형우가 타선의 주축으로 나서기는 힘든 두터운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최형우가 주전을 꿰찬 2008년은 이미 이승엽과 마해영이 팀을 떠나고 양준혁과 심정수 등이 주류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시점이었다. 삼성도 선동열 감독 취임 후 팀 컬러가 투수 및 수비 중심으로 바뀌면서 최형우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신재영도 마찬가지다. 올시즌 전 넥센은 로테이션을 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발 자원이 빈약했다. 그가 선발로 가능성이 높다고 본 염경엽 감독이 믿음을 보냈다. 2013년 넥센으로 트레이드된 신재영은 경찰야구단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가을 전역 후 본격적인 성장 과정을 밟게 된다. 그의 가능성을 타진한 지도자는 지난해 마무리 캠프 때 이강철 수석코치(현 두산 베어스 코치)였다. 이 코치는 신재영에 대해 볼끝의 움직임과 제구력이 좋다고 보고 자신과 같은 사이드암이라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손 혁 투수코치도 투구폼과 마운드에서의 행동, 그리고 마인드 부문에서 성장에 도움을 줬다. 에이스인 앤디 밴헤켄이 떠나면서 선발진이 허술해지자 염 감독은 피어밴드, 코엘로, 박주현, 양 훈, 그리고 신인 신재영을 5선발로 중용했다. 신재영은 이들 5명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로테이션을 지켰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성장 신화'로 마이크 피아자가 있다. 198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62라운드 전체 1389번째로 LA 다저스의 지명을 받은 피아자는 1992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이듬해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이후 피아자는 공격형 포수를 이름을 드높이며 통산 427홈런을 날렸고, 올스타에 12번 뽑혔다. 입단 후 그가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1년으로 그해 더블A와 트리플A에서 타율 2할7푼7리, 29홈런, 80타점을 기록했고, 1992년에는 125경기에서 타율 3할5푼에 23홈런, 90타점을 때린 뒤 메이저리그로 올라섰다. 피아자는 16살 때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타자 테드 윌리엄스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메이저리그 입성 후에는 토미 라소다 감독의 애정을 받으며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미니카 윈터리그 등 출전하는 등 피아자는 마이너리그 시절 성장을 위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아카((赤) 고질라'로 유명한 히로시마 카프의 시마 시게노부가 유명하다. 10년간 2군을 전전하던 시마는 2004년 1군에 올라 32개의 홈런을 날리며 팀의 간판타자로 자리매김했다. 히로시마의 상징인 붉은 색(아카)과 그의 배번 55번의 대명사인 마쓰이 히데키의 별명 '고질라'가 합쳐져 아카 고질라라는 별명이 붙었다. 시마의 능력을 간파하고 키운 지도자는 우치다 타격코치였다. 2003년 후 방출 위기에 놓였던 시마는 2004년 오가타, 모리가사, 아라이 등 팀의 주력 타자들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기회를 잡았다.
무명에서 벗어나려면 좋은 지도자를 만나고 팀내 환경이 조성돼 기회도 주어져야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성실성이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명심해야 한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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