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조선 이승미 기자] 분명히 악역이었으나 자꾸 마음이 간다.
지난 10월 18일 종영한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연출 김성윤, 극본 김민정)에서 야망에 가득찬 표독한 중전 김씨를 연기한 한수연. 그가 그린 중전은 성정이 유약하고 몸이 쇠약한 왕(김승수)을 제 손아귀에 쥐고 살며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인 세자 이영(박보검)를 눈엣가시 같이 여긴 인물. 대군을 낳은 후 이영을 폐한 후 세자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중전은 세자는 물론 그와 가깝게 지내는 홍라온(김유정)을 내쳤을 뿐 아니라 아들이 아닌 딸을 낳자 자신의 자식까지 버렸다.
3일 인터뷰를 위해 스포츠조선 사옥에서 만난 한수연에게서는 여전히 이제 떠나보낸 중전을 향한 남다른 애정이 느껴졌다. '중전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졌다'는 기자의 말에 애정이 "고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이하 한수연와 일문일답 인터뷰)
|
-독하고 표독스러운 악역을 연기했는데 실제로 보니 인상이 악역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선하다.
"그래서 그런지 '구르미 그린 달빛' 전까지는 억울하게 당하고 괴롭힘 받는 역을 주로 맡았다. 외모 때문에 누가 나를 악역으로 써줄까 걱정도 많았고 악역을 했을 때 시청자들에게 느낌을 잘 전해드릴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안에 여러 가지 자아와 표정이 있는 것 같더라. 방송을 보니까 생각보다 서늘한 느낌이 잘 표현된 것 같아 기쁘다."
-감독이 왜 선한 인상의 한수연을 악역으로 캐스팅했을까.
"저도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하다.(웃음) 감독님께 이유를 여쭤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거 여쭤보는 게 건방져 보일 것 같기도 해서 그저 '캐스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했다.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어떤 캐릭터 리딩을 시키실지 모르니까 가장 아끼는 청순 느낌의 흰 원피스를 입고 갔다. 그런데 리딩 할 때 중전 역에 확 끌렸다. 그때 입고 있던 옷이나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였는데 너무나 끌려서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중전 역에 끌렸던 이유는 뭔가.
"대사가 입에 착착 붙었다. 말투도 표현도 평소 제가 쓰는 게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입에 붙더라. 뭔가 내가 진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면 이런 말을 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웃음)불 같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조근조근 친절한 말투로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서늘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감독님도 현장에서 "중전에 가장 필요한 건 딱 하나다. '어린 미실!'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전에게 '중그로'(중전+어그로)라는 별명이 붙었다. 악역임에도 귀엽고 시청자의 애정이 느껴지는 별명이다.
"극 초반에는 정말 욕을 많이 먹었다. 댓글을 봐도 다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이었다.(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중전을 향한 댓글이 애정으로 바뀌더라. 보면 볼수록 정이 간다는 반응이었다. 극중 중전이 악행을 저지르긴 해도 결국 그 악행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라온이를 괴롭힐 때마다 세자한테 한 방 먹고 윤성이한테 한방 먹고 이런 식이니까 어설프고 허당기 많은, 귀여운 캐릭터로 봐주셨던 것 같다."
-출산장면부터 자신의 아이를 거부하는 장면까지 유독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들었던 연기가 많았던 것 같다. 가장 힘들었던 연기는.
"출산연기가 단연 어려웠다. 꼭두새벽부터 무려 6시간을 촬영했다. 그 장면을 찍을 때 처음으로 세트 안에 지미짚까지 들어왔다. 그만큼 감독님이 심혈을 기울인 장면이었다. 촬영하면서 너무 울어 눈이 띵띵 붓고 온몸에 힘을 줘서 온 근육이 다 뭉쳤다. 또 재갈을 하도 세게 물어서 몇 일간 턱도 제대로 안 벌어질 정도였다. 그 촬영이 끝나고 체력도 한 풀 꺽인 기분이었다. 길게 찍은 것에 비해 길게 나오지 많아 아쉽긴 하지만 고생한 만큼 잘 나온 것 같아 만족한다. 현장에 아이를 낳아본 스태프가 '한 다섯 쌍둥이 낳아본 사람 같았다'라고 말하고 엄마 역시 '정말 아름다웠다 고생했다'고 칭찬해줬다."
|
"당연히 촬영할 때 유정 씨를 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심지어 유정 씨와 처음 만났을 때 그 장면을 찍었다. 원래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이 더 불편하지 않나.(웃음) 다행히 NG를 한 번도 안내고 찍었다. 그런데 컷이 떨어진 후에도 유정 씨가 한쪽 편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 그런데 아파서 우는 거라기보다는 뭔가 서러움이 터져서 우는 듯했다. 이유를 묻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친하지 않아서 물을 수 없었다. 드라마 끝나고 세부로 포상휴가 갔을 유정 씨와 진중하게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당시 라온이의 감정에 너무나 이입이 됐다고 하더라. '라온이는 뭘 잘못했길래 엄마랑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입기 싫은 남자 옷을 입고 내시까지 되어 궁에서 이런 설움을 당하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안 멈췄다고 하더라. 캐릭터에 그렇게 까지 이입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프로'라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의 뜨거운 인기와 쏟아지는 관심 때문에 가족의 반응도 남달랐을 것 같다,
"엄마가 정말 좋아하셨다. 진짜 오랜만에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사랑받는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게 됐다는 걸 기뻐하셨다. 원래는 영화를 주로 해서 엄마를 모시고 극장에 가거나 DVD가 나오면 내가 나온 작품을 보여드리곤 했는데 이번 작품은 집에서 편하게 보시고 또 본인 친구들에게도 '딸 나온 거 잘봤다'라는 연락을 받아 굉장히 행복해 하셨다. 그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가족을 위해 사랑받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남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면 난 벌써 이 일을 그만 뒀을 거다. 하지만 항상 스스로에게 남들을 의식하지 말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밥벌이를 하자고 생각했다. 연기만큼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다. 물론 굉장히 힘들었던 순간도 많았다. 30만원 받는 단편영화, 100만원 받는 독립 영화를 쭉 하다보니 생활하기도 힘들었다. 작품이 아예 안 들어와서 마냥 쉰 적도 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포기하랴고 마음 먹은 순간마다 작품에 캐스팅이 돼 실낱같은 빛이 들어왔다. 최근까지도 일이 안들어와서 8개월을 내리쉬었는데 갑자기 영화 '밀정'에 캐스팅 되고 장진 감독님이 연출하신 연극 '꽃의 비밀' 무대에 서게 되고, '구르미 그린 달빛'에 출연하게 되고 영화 '더 킹'까지 찍게 됐다."
-영화 '밀정'에 짧은 등장이었지만 큰 인상을 줬다.
"영화 시간 관계상 많은 부분이 편집돼 아쉽긴 하지만 사실 '밀정'을 찍으면서 정말 기분이 남달랐다. 외증조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의병대장을 하셨다, 그래서 '밀정' 출연은 저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굉장히 큰 의미였다. 현장에서 송강호 선배님이 굉장히 예뻐해 주셔서 행복했고 김지운 감독님과 함께 한다는 것 자체도 영광스러웠다."
-'구르미 그린 달빛'은 어떤 작품인가.
"식상한 말이지만 저한테는 정말 너무나 감사한 작품이다. 너무나 치열했고 치열했던 것 만큼 보상해준 작품이다. 날 굉장히 아프게 했지만 아프게 한 만큼 다시 따듯하게 안아준, 그런 작품이다."
smlee0326@sportschosun.com, 사진=최문영 기자 de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