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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기기에서 구동되는 프로그램을 다른 기종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 혹은 기기를 에뮬레이터(Emulator)라 한다. 에뮬레이터라는 이름의 근원인 'Emulate'가 '모방하다', '흉내내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니 이것만 봐도 에뮬레이터의 기능을 유추할 수 있다.
게이밍 에뮬레이터는 90년대 초중반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국내 유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후반부터다. 8비트 콘솔인 패미컴의 게임들을 구동할 수 있도록 돕는 도스(DOS) 기반 에뮬레이터인 'NESticle'가 1997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16비트 콘솔인 슈퍼패미컴 게임들을 구동할 수 있는 ZSNES, SNES9X가 유저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에뮬레이터라는 개념을 가장 폭발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프로그램은 따로 있다. 네오레이지(Neorage)가 그 주인공. PC방 등장 이전인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국내 아케이드 게임 시장은 대전격투게임 부흥기와 맞물려 큰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네오레이지는 오락실에서만 즐길 수 있던 킹오브파이터즈나 사무라이쇼다운 등의 게임을 PC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신박한 존재였다.
최초 버전인 도스 버전은 게임을 한 번 하는데 5분 가량의 로딩을 거쳐야했지만, 펜티엄2가 최신 사양의 PC였던 시절에 구형 컴퓨터로도 오락실에서 하던 게임을 집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고, 에뮬레이터의 존재를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에뮬레이터의 보급과 인기가 서점가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에뮬레이터와 함께 게임 롬셋을 포함한 CD를 부록으로 증정하는 책들이 적지 않은 인기를 얻고 판매됐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의 헤프닝이지만, 에뮬레이터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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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E의 보급은 아케이드 게임들을 PC에서 구동할 수 있는 에뮬레이터 시장을 한방에 정리하는 사건이었다. 아케이드에는 SNK의 MVS, 캡콤의 CPS, 세가의 시스템32, 모델2, 모델3, 타이토의 F2, F3, 남코의 시스템 86, 1, 2 등 각 게임사마다 활용하는 각기 다른 기판이 존재하며, 각 기판에 해당하는 에뮬레이터가 각각 존재해 그 수가 대단히 많았다.
MAME는 'Multi Arcade Machine Emulator'라는 이름 그대로 다양한 아케이드 기기에 모두 대응(*세가의 모델2, 모델3, 린드버그 등 MAME가 지원하지 않는 기판도 다수 존재한다) 하기 시작하며 에뮬레이터 유저들이 '편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데 일조했다. 마니아 사이에서는 각 기판 전용 에뮬레이터를 사용해야 원작을 100% 구현할 수 있다며 MAME에 거부반응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게임을 100% 구현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에 목표를 둔 대다수의 유저들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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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뮬레이터는 다른 기종의 게임을 PC에서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것에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각 게임의 저작권을 위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다. 에뮬레이터의 이용자체는 불법이 아니지만, 각 게임 롬셋을 '배포'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게임 기판에서 롬셋을 추출해 PC에서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대부분의 에뮬레이터 이용자가 롬셋을 다운로드 해서 이용하지, 자신이 추출하는 경우가 없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에뮬레이터의 보급으로 인한 시장성 확대, 반대로 에뮬레이터로 인한 게임시장 위축은 각 게임사의 골칫거리가 됐지만, 게임사들은 이를 오히려 새로운 시장을 펼칠 기회로 여기기 시작했다. 닌텐도의 버추얼콘솔, 소니의 게임 아카이브즈, MS의 엑스박스 라이브 아케이드은 이러한 게임사들의 인식전환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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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과거 게임들을 최신 콘솔에서 구매해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에뮬레이터 서비스로, 닌텐도의 버추얼콘솔 같은 경우는 과거 기기의 성능부족으로 인해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슬로우, 스노우 현상까지 그대로 재현해서 판매할 정도로 철저한 품질검수를 거치고 있다.
에뮬레이터 시장이 사업성을 가진다는 점에 착안한 기업은 비단 비디오게임 시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모바일게임 시장에서도 모바일게임을 PC로 구동하는 에뮬레이터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편리하기는 하지만 조작성에 제한이 있는 터치 디바이스가 아닌 키보드와 마우스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 스마트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PC의 CPU와 GPU를 활용해 성능 저하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이들 PC 기반 모바일 에뮬레이터의 특징이다.
아케이드, 비디오게임 기반 에뮬레이터 시장이 사업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덕분인지, 모바일게임 에뮬레이터(앱플레이어)는 스마트폰 기반 모바일게임 시장의 역사가 다른 플랫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음에도 빠르게 이를 활용한 사업을 시작한 기업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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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한국 지사를 설립한 블루스택과 3월부터 카카오가 서비스를 시작한 별플레이가 이런 사례의 대표적인 경우다.
블루스택(Bluestack)은 안드로이드 환경을 PC로 그대로 옮겨 애플리케이션을 구동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모바일게임 에뮬레이터로는 국내 유저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진 존재다. 대다수의 게임을 지원하며, 설치방법이 간단하다는 것은 블루스택이 국내에서 빠르게 인지도를 높일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다.
인터페이스가 직관적이라는 점 역시 에뮬레이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블루스택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다른 모바일 에뮬레이터에 비해 리소스 점유율이 높지 않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블루스택 측은 매크로, 오토 등 게임성을 해치는 불법 프로그램 차단을 비롯해 개인정보 보호 등의 보안 강화에도 신경을 써 모바일게임 시장을 공략한다는 방침을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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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별플레이는 블루스택과 함께 모바일 에뮬레이터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녹스(NOX)를 기반으로 하는 에뮬레이터 서비스다. 녹스가 특유의 간편한 루팅, 간단한 설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매크로 기능, 가상 위치 지원으로 빠르게 인기를 얻은 에뮬레이터라는 점을 생각하면, 카카오와 녹스의 협업은 시장의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녹스 특유의 장점으로 꼽히는 매크로 기능은 별플레이에서는 공정한 게임플레이 환경 제공을 위해 이용할 수 없고, 기존에 이용 중이던 녹스 위에 카카오 별플레이가 설치된다는 점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에뮬레이터는 개인이 알음알음 사용하는 프로그램 수준을 넘어 기업들이 주요 사업모델로 인식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했다. 유저들은 편리함을, 게임사는 확장된 플랫폼에서의 매출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저와 기업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시장이다.
과연 기업들이 주도하는 에뮬레이터 시장은 어떤 형태로 발전해 유저들에게 '발전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 국내 게임 시장에서 에뮬레이터가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게임인사이트 김한준 기자 endoflife81@gam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