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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이상 비정상적으로 운영돼온 방송통신위원회가 새 정부 출범 후 다시 한번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전 정부에서 시작된 각종 소송전에서 족족 패소하는 가운데 사실상 1인 체제가 된 상황에서 위원장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고 여권의 퇴진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 2인 체제 의결 안건 '줄패소'…정권 교체기마다 식물화 데자뷔
방송·통신 규제의 독립성을 위해 상임위원 임기가 보장되는 방통위는 정권 교체기마다 식물 상태를 겪어왔다.
위원장은 임기를 지키고자 하고, 정부·여당에서는 국정철학과 맞는 인사를 임명하고 싶어 하는 만큼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갈등이 심한 경우 해임 수순으로 감사나 수사가 이어지기도 한다.
2년 전부터는 위원장 해임과 청문회, 탄핵, 사퇴 등이 연거푸 이어지면서 줄곧 1인 또는 2인 체제로 운영돼 조직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김홍일 전 위원장과 이상인 전 부위원장, 이진숙 위원장과 김태규 부위원장 등 2인 체제에서 의결된 공영방송 이사 선임 등 굵직한 안건들은 법원에서 줄줄이 효력이 정지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고법에서 1심을 뒤집고 KBS 신임 감사 임명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는 보기 드문 사례까지 발생, 사실상 전체회의 개최도 어려워진 상황이다.
이에 더해 김 부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사실상 1인 체제가 됐고, 이 위원장의 대전MBC 사장 재임 시절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을 수사 중인 경찰이 세 번째 압수수색을 벌이는 등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 원모델인 美 FCC도 표류…합의제-독임제 장단점 뚜렷
방통위의 원(原)모델인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역시 최근 핵심 위원 퇴진과 리더십 공백 사태에 직면, 합의제 모델 자체의 수명이 다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에서는 공화당 위원인 네이선 시밍턴과 민주당 추천 위원 제프리 스타크스가 이달 동시에 퇴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시밍턴의 후임을 지명해야 하며, 상원 민주당 지도부는 스타크스 후임 지명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민주당 위원 2명을 해임한 전례와 맞물려 민주당 몫 위원 지명을 둘러싼 여야의 샅바 싸움이 치열하다. 전통적 여야 3대 2 구도가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회 여야 추천 몫이 혼재해 정치 셈법에 따라 위원 충원이 지연되고 조직 마비가 반복돼온 한국 방통위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를 노출한 셈이다.
합의제의 장점은 미디어가 가진 특수성에 따라 여야 합의를 통해 민주적 방식으로 미디어 거버넌스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응해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독임제는 산업 진흥을 위해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미디어 진흥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고려할 때 미디어 거버넌스를 일방적으로 구성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장은 15일 "미디어 산업 진흥과 공적 가치 구현 등 미디어 거버넌스가 지향해야 하는 성과에 부처 형태만이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실에 미디어 전담 수석실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요소가 고려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 합의제 유지하며 분야별 통합-분산 전망…개편은 상수, 시기는 미정
조직 개편 자체는 상수인 상황이지만, 실제 개편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이는 방송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줄었지만 주체 간 정치적 이해관계가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새 정부 출범 후 '방송3법' 처리에 속도 조절이 이뤄지고 있는 분위기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직 개편과 관련해서도 여러 안이 나왔던 만큼 실제 국정기획위원회 내에서 어떻게 조율될지 당장 가늠하기는 어렵다.
현재로서는 5인 합의제 구조를 유지하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진흥국과 합쳐 기존 방통위가 아닌 새로운 기구로 재편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될 경우 기존 위원들의 임기는 자동으로 종료된다.
다만 한국언론학회 등 미디어3학회는 공영방송을 다루는 공영미디어위원회와 독임제인 정보미디어부를 신설하고 대통령실 산하 수석실에 방송·통신 미디어 콘텐츠를 다루는 부서를 두자는 제언도 했다.
여당에서도 방통위원 확대와 위원장 임명 시 국회 동의 절차 도입 등 여러 안을 내놨던 상황이라 국정기획위 내에서 조율이 필요해 보인다.
이성민 방통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여러 정책 대안이 제시되고 관점들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것에 비해 정책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상황이란 점이 이 분야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것 같다"며 "방송 영향력과 역할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한 현실 속에서 기존 제도적 틀이 갖는 한계가 부각된다"고 말했다.
부처의 이해관계가 아닌 시장 변화와 산업 육성, 미디어 소비자 보호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용희 선문대 경영학과 교수는 "방송 공영성과 산업적 진흥 간 가치가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 당분간 의견을 수렴하는 시간이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며 "관련 산업이 글로벌화를 표방하지만, 준비를 못 한 부분이 커 산업 진흥에 무게가 실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lisa@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