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박지성(31·맨유)은 일본 J2-리그 선수였다. 교토상가 소속이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일본 2부 리그 선수가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 생각지 못했다.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 해 1월 히딩크 감독의 한국 A대표팀 사령탑 부임 이후에도 박지성은 계속해서 태극마크를 달았다. 빨랐다. 축구센스가 넘쳤다. 다시 말해, 영리했다.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이 선호하는 선수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운도 따랐다. 선수의 이름값 대신 기량만으로 선수 발탁이 이뤄졌다. 1년간 히딩크 감독과 동고동락했다. 스물 한 살이었던 박지성은 꿈을 이뤘다. 월드컵에 출전했다. 정점은 2002년 6월 14일 찍었다. 포르투갈과의 한-일월드컵 조별예선 3차전(1대0 승)에서 후반 25분 결승골을 터뜨렸다. 이영표의 크로스를 가슴으로 트래핑했다. 개인기로 수비수 한 명을 제친 뒤 왼발 슛으로 상대 골키퍼 가랑이를 뚫었다. 환상적이었다. "포르투갈전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물론 제가 골을 넣은 경기였기 때문이겠죠." 박지성은 그 때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스포츠조선은 2002년 한-일월드컵 10주년을 맞아 '아시아축구의 별' 박지성과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한-일월드컵은 박지성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박지성은 "그 때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내 축구인생이 끝나더라도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에게는 첫 월드컵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축제였다"고 회상했다.
10년이 흐른 동안 많은 감독을 만났다. 대표팀에서만 김호곤(감독대행)-움베르토 쿠엘류-박성화(감독대행)-본프레레-딕 아드보카트-핌 베어벡-허정무-조광래 등 8명을 거쳤다. 여기에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까지 더하면 9명으로 늘어난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은 뭐니뭐니해도 히딩크 감독이다. 박지성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은) 나를 유럽에서 뛸 수 있게 해주신 분이다. 또 유럽에서 잘 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라고 했다. 단지, 국가대표가 꿈이었고, 막연히 유럽무대에서도 뛰고 싶었던 박지성이었다. 그 꿈을 모두 실현시켜준 '은인'이 히딩크 감독이다.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 유니폼을 입게 해준 것도,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자신감을 불어 넣은 것도 히딩크 감독이었다.
2005년 영국으로 건너간 박지성은 '아시아축구의 별'이 됐다. 아시아선수가 유럽무대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렸다. 반면, 아쉬움도 존재한다. 지난해 초 카타르아시안컵을 끝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무릎부상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후배들을 위해서였다. 한국축구의 더 밝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대표팀을 은퇴했다. 박지성은 "그동안 '한국축구가 충분히 세계와 경쟁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가장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요즘 일각에선 '박지성의 빈 자리가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대표팀 경기를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밝힌 박지성은 "분명한 것은 한국축구는 나 없이도 충분히 잘해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지난달 25일 수원시 영통구에 위치한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열린 '제2회 LG생활건강 JS컵 유소년 축구대회' 클리닉에서 대회에 참석한 유소년 선수들과 함께 미니게임을 펼치고 있는 박지성. 수원=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m.com
지금 시점에서 10년 후 한국축구에 대한 그림도 그린 박지성이다. 그는 "한국축구 전체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하려는 마음과 실천이다. 많은 팬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밝혔다. 스스로 그린 2022년의 모습은 축구 외교에 힘쓰는 조력자다. 박지성은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제2의 인생' 준비를 마친 상태일 것"이라고 했다. 이어 "지도자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축구 외교 분야에 현재 관심을 두고 있다. 은퇴를 한 뒤에는 공부를 더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