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규 신임 대한축구협회장이 31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의 기자회견에 참석,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예기치 않은 깜짝 만남이었다.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67)의 기자회견이 끝나는 순간 신임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51)이 출연했다. 뜨겁게 악수를 했다. 허 회장은 "이런 곳까지 왜 오셨느냐"며 감사해 했고, 정 회장은 "당연이 와야죠"라며 활짝 웃었다. 여와 야로 갈기갈기 찢어진 한국 축구, 소통과 대통합을 향한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20년간 비주류의 길을 걸은 허 회장에게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은 '금단의 땅'이었다. 치열했던 제52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가 막을 내린 지 사흘이 흘렀다. 허 회장은 2전3기의 도전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기다린 것은 세 번째의 눈물이었다. 1차 투표에서 8표로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투표에서 현대가의 막강 파워를 넘지 못했다. 당선된 정몽규 축구협회장은 1차에서 7표를 받았다. 결선투표에서 8표를 더해 15표를 득표했다. 허 회장은 1표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허 회장이 문지방을 넘었다. 31일 축구회관을 찾았다. 허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기 위해 정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정 회장도 흔쾌히 수락했다. 여권의 심장인 축구협회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유가 뭘까. 해방감이라고 했다. "선거가 끝나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서 아주 마음이 편했다. 선거 직후의 복잡하고 이리 저리 뒤엉켰던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머릿속이 말끔하게 개인 느낌이었다. 선거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데 대한 해방감인가도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난 15년간 세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저를 억눌러왔던 것들에게 해방된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해방감인 동시에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이 에너지들을 이끌어줘야 하겠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이기도 했다."
GS그룹을 창업한 고 허만정 회장의 일곱번째 아들인 허 회장은 보성고와 연세대를 거쳐 신탁은행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했다. 이번 선거에 나선 4명의 후보 가운데 유일한 축구인 출신이다. 최순영 전 축구협회장이 재임하던 1980∼1989년 국제담당 이사와 김우중 전 축구협회장 체제였던 1990∼1991년 국제담당 부회장 겸 상비군관리위원장(현 기술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현대가가 축구협회를 장악한 후 음지에 있었다. 1997년과 2009년 두 차례 축구협회장(1997년, 2009년)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허 회장은 이번 선거에서 대의원들의 표심은 얻지 못했지만 현장 지도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저를 지지했던 현장의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위로와 격려도 있었지만 누군가를 향해 폭발할 듯한 분노도 적지 않았다"며 "한번 전화를 걸면 지도자 6~7명이 바꿔가며 한국축구를 걱정하며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고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선거에 져서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그 긴 세월동안 나만을 바라보면서 한국 축구의 개혁을 기다렸던 그분들에게 아니 나를 통해 올바른 축구의 길을 개척하고자 학수고대했던 그 분들에게 좌절의 상처를 넘어 이제는 새로운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고 깨달았다. 나를 지지했던 분들도 이제는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화해를 위해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외람되지만 내가 패배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다시 서게 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허 회장은 새 시대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는 "좋은 뜻이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되면 상처가 되고 일부는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더 늦기 전에 이분들의 순수한 열정을 한국 축구를 새로 짊어지게 된 분들에게 전해드리고 그 분들을 통해 제가 이뤄내지 못했던 소망들 실현되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남은 나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이것만이 진정한 화해이자 미래를 위한 대통합의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번 선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축구계가 반목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분열을 넘어서 소통과 통합의 시대로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에 대한 신뢰도 밝혔다. 허 회장은 "이제 변화와 개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련해야 한다. 다행히 새롭게 축구협회를 맡게 된 정몽규 회장님은 이런 시대적 역할을 충분히 훌륭하게 수행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집행부가 한국축구의 백년대계를 만들 수 있도록 모두 하나가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특히 현장 지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그들의 열망을 정책적으로 담아주시기를 바란다. 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보태겠다"고 덧붙였다.
선거는 막을 내렸다. 허 회장과 정 회장의 만남은 새로운 시대의 단면이었다. 야와 야의 오랜 반목이 서서히 녹고 있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