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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15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한국 A대표팀이 체코와의 원정 평가전에서 0대5 대패의 수모를 당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던 김남일(37·전북)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웠던 경기였다. 김남일은 0-1로 뒤진 상황에서 우리 골문을 향해 드리블 및 백패스를 하다 공을 빼앗겨 추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대패에 대한 비난이 모두 그에게 쏟아졌다.
대패를 경험해본 사람이 대패를 당한 대표팀 선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아는 법이다. 김남일은 멕시코, 미국과의 2연전을 지켜보며 대표팀 후배들이 겪었을 심적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렸다. 그는 "전반에 2~3골을 먹으면 정말 경기를 하기 싫다. 시간만 보게 된다. 후반에 더 실점하면 자기 컨트롤이 안된다. 조직력이 결코 살아날 수 없다.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다.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에겐 위기가 기회였다. 체코전 대패의 충격을 딛고 김남일은 한-일월드컵에서 맹활약해 4강 신화의 주역이 됐다. 김남일은 소중했던 경험을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어했다. 평가전 대패가 홍명보호에 큰 반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그는 "내가 실수했을 때 감독님이 믿음으로 자신감을 주셨다. 나에게는 그 상황이 오히려 약이 됐다. 미리 대패를 한 경험이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를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이어 "대패를 당하게 되면 선수단 사이에서 위기의식이 생긴다. 오히려 배포도 생기게 된다. 큰 경기에 나가도 위축되지 않게 된다. 더 큰 점수차 대패가 됐어도 괜찮았다.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대패는 분명 잃는 것보다 얻는게 많다"며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상파울루(브라질)=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