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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인터뷰]유상철 감독 "강인이가 빨리 나아서 대표팀에서 함께 하자네요"

기사입력 2020-01-01 05:10



[스포츠조선 박찬준 기자]"얼마 전 딸이랑 서점에 갔어요. 2020년 다이어리를 봤는데, 되게 두껍더라고요. 그 안에 '무슨 얘기를 채울 수 있을까' 생각하니까 괜히 설레더라고요. 희망찬 이야기를 담아봐야죠."

오랜만에 만난 유상철 인천 감독(49)의 모습은 밝았다. 말기암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평소 유 감독의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여전히 자신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온 것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시 축구장에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대표팀의 폭발적 인기, K리그의 역대급 흥행 등으로 꽃길을 걷던 2019년 한국축구, 연말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유 감독은 11월 19일 구단 공식 채널을 통해 자신의 몸상태를 공개했다. 췌장암 4기. 현역시절부터 정열적이고 헌신적이었던 유 감독이었던 만큼, 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유 감독은 투병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벤치에 앉았다. "인천을 잔류시키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유 감독의 투혼을 앞세운 인천은 극적인 잔류에 성공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유 감독은 팬들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또 한 번의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즌을 마친 유 감독은 치료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의 휴식이 익숙하지 않은 눈치였다. 12월 30일 자택이 있는 경기도 용인 수지에서 만난 유 감독은 "맨날 밖에 있던 사람이 집에 있으려니 힘들다. 아내가 세끼를 다 차려줘야 하니 더 힘들거다"고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 치료 과정은 쉽지 않았다. 3차 항암 치료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유 감독은 "1, 2차는 그럭저럭 받을 만했다. 3차 때는 너무 힘들더라. 밥도 잘 안넘어갔다. 환자복과 침대만 보면 울렁거렸다.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예후가 좋다. 유 감독은 "의사가 놀라더라. 확실히 체력이 좋으니까 남들보다는 잘 버티고 있다. 이제부터라는데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 했다.


유 감독은 지금도 가끔 처음 진단을 받던 순간이 생각난다. 그는 "자다가 벌떡 일어난다.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방 밖에 나와 한참 멍하니 앉아 있는 게 버릇이 됐다"고 했다. 황달기가 눈에 띄게 심해지며 찾아간 병원, "큰 병원으로 가라"는 소리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췌장암 말기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어머니를 그토록 괴롭혔던 바로 그 병이었다. 유 감독은 "아무 증상이 없었다. 다만 진단 받기 전에 엄청 피곤하더라. 단순 피로라고 생각했는데…"라고 했다. 진단 후 머리가 하얘졌다. 유 감독은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표현을 그때 알았다.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 숙소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유 감독은 "머리가 하얘지다 이제 하나씩 불이 들어왔는데 가족, 그리고 선수들이 생각나더라"고 했다. 유 감독은 당당히 그라운드에 섰다. 빗속에서, 추위 속에서 선수들과 함께 뛰며 울고 웃었다. 놀라운 투혼이었다. 유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약해보이는게 싫었다. 아마 그런 마음이 나온 것 같다"고 했다. 또 하나의 힘은 팬들이었다. 유 감독은 "라커룸에서 그라운드로 들어가는데 함성소리가 들리면 아드레날린이 확 퍼진다. 그때는 잡념이 사라지고, 정말 경기에만 몰입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준 게 인천팬들이었다. 잔류를 확정한 경남 원정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유 감독의 투병 소식이 전해지며 많은 축구인과 팬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중 기억 나는 이는 여름이적시장에 직접 유 감독이 영입한 김호남이었다. 유 감독은 "시즌을 마치고 정리하러 사무실에 갔는데 편지 한 통이 있더라. 팬레터인줄 알았는데 김호남이 썼다. 다섯장이나 됐는데 꾹꾹 눌러쓴 그 정성이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고 했다.


파주=박찬준 기자
최근에는 특별한 손님도 병문안을 왔다. '슛돌이' 이강인(발렌시아)이었다. 유 감독은 지금의 이강인을 만든 스승 중 한 명이다.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이강인을 직접 지도했다. 유 감독은 "강인이에게 전화가 왔다. 중간에 파주에서 살짝 만나기는 했지만, 일곱살때 이후 처음 만나는거나 다름이 없어서 사실 걱정도 됐다. '이놈 스타됐다고 건방져 졌으면 어떻게 하지' 했는데 너무 바르게 컸더라"고 했다. 이어 "강인이에게 축구가 전부였다. 이런 멘탈이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 내가 유럽에 갔으면 좋겠다고 했던 이유였는데, 그렇게 커줘서 고마웠다. 강인이에게 '네가 유럽에서 성장했지만 나중에는 꼭 한국에서 네가 배운 것을 전해줘야 한다는 마음을 잊지 말아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언젠가 감독님이 대표팀 감독하고 같이 월드컵 갔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데 뭉클했다"고 했다.


상황은 쉽지 않다. 갑자기 몸상태가 확 나빠질때면,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은 '축구'다. 현역 시절 최고의 순간을 누렸던 유 감독은 아직 지도자 변신 후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기세를 올릴 때마다 변수를 만났다. 대전을 잔류시킨 후 다음 시즌을 계획했지만 계약 만료로 지휘봉을 내려놨고, 인천에서는 췌장암에 발목이 잡혔다. 유 감독은 "솔직히 아직 내가 하고 싶은 축구를 못했다. 대전과 인천에서 모두 상황때문에 결과를 내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올 시즌을 마친 후 어떻게 하면 다음 시즌에 더 잘할 수 있을지 그림이 딱 그려졌다. 자신도 있다. 꼭 돌아와서 나만의 축구로 인천팬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유 감독은 투병 중에도 축구를 놓지 않고 있다. 전술을 공부하고,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고 있다.

2020년, '감독 유상철'에게는 가장 중요한 해다. 코뼈가 부러져도 헤더로 골을 만들어내던 '투지의 상징' 유 감독은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적을 만났다. 그럴수록 유 감독의 마음은 더욱 강해진다. 유 감독은 "나의 2020년 다이어리는 희망으로 채우고 싶다. 1월 2일 시작되는 4차 항암 치료부터는 강도가 더 세진다고 한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부딪히고, 이겨내겠다. 그래야 강인이랑 대표팀에서 만나볼 수도 있고, 계속 내가 좋아하는 축구와 함께 할 수 있지 않나"라며 웃었다. 투지의 아이콘에서 희망의 아이콘이 되려는 유 감독의 2020년을 응원한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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