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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완연한 영양의 깊은 산자락을 걷다 보면 발밑에서부터 향긋한 숨결이 피어오른다.
깊은 산속 산나물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다. 조상들의 건강을 지켜온 자연의 유산이자, 계절의 맛을 선물하는 봄의 전령이다.
삶의 터전이 산불로 잿더미가 되었던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거친 자연을 견디며 터득한 그 강인함 덕분일지 모른다.
영양군은 봉화, 청송과 함께 머리글자를 따 일명 '비와이씨'(BYC)로 불리는 경북 대표 오지다.
이 지역이 자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 청정하고 무구한 자연이다. 매년 봄이면 영양군에서는 산나물을 주제로 한 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꼭 20년째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해마다 이곳은 다양한 산나물로 넘쳐난다. 산나물이 가장 풍성하게 자라는 곳이 바로 일월산 자락이다.
곰취, 취나물, 참나물, 산마늘, 고사리 등 봄 산나물들이 지천으로 자란다.
쌈으로 먹거나 나물로 무쳐내면, 봄의 향기를 가득 담은 건강한 한 끼가 완성된다.
이 가운데 어수리는 예로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를 만큼 귀한 나물로 여겨져 왔다.
품질 좋은 어수리는 예약이 밀릴 정도로 인기다.
해발 700∼8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자생하며, 특히 일월산 자락에서 자란 어수리는 영양을 대표하는 봄 산나물이다.
청정한 산골에서 자라 특유의 향과 부드러운 식감을 지닌 어수리는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동의보감'에서는 '왕삼'이라 불리며, 피를 맑게 하고 염증을 가라앉히는 귀한 약재로 기록돼 있다.
◇ 취나물, 봄의 건강한 유혹
청정 산지에서 자란 자연산 취나물은 향과 맛이 특히 뛰어나다.
취나물을 먹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숯불에 구운 쇠고기와 함께 생으로 먹는 것이다.
향긋한 취나물의 향이 육류와 무척 잘 어울린다. 삶아 무치는 것도 좋다.
데친 뒤 자연 건조해 냉동 보관하면 겨울철에도 즐길 수 있다.
비타민 A와 C, 칼슘, 칼륨이 풍부해 면역력 강화, 뼈 건강, 체내 염분 배출에 효과적이며, 항산화 성분 덕에 노화 방지와 항암 효과도 기대된다.
알칼리성 식품으로 현대인에게 유익한 식재료다.
◇ 보물 같은 약초, 잔대
잔대는 인삼을 닮은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얼핏 보면 잡초처럼 보이지만,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귀한 약재로 사용돼 왔다.
'사삼'(沙參)이라 불리며, 인삼과 함께 '5대 삼'에 포함될 만큼 약효가 높은 식물이다.
조상들은 뱀에게 물렸을 때 해독제로 썼을 정도로 강한 해독 작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특히 폐를 서늘하게 식히는 성질 덕에 마른기침이나 가래에 효과적이다.
다만 성질이 차므로, 몸이 냉한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구워 먹거나 나물로 무치고, 차로 달이거나 꿀에 절여 복용해도 좋다.
뿌리부터 잎사귀까지 버릴 것이 없는 잔대는, 봄철 미세먼지로 목이 칼칼해지는 요즘 기관지를 위한 자연의 처방전으로 주목받는다.
◇ 혈을 살리는 당귀
당귀(當歸)라는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마땅히 돌아온다'는 뜻으로, 옛 중국에서는 부인이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에게 당귀를 품에 넣어주며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전장에서 지친 기력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인 약초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귀는 혈을 보하고 순환을 돕는다. 특히 여성 질환에 효과가 뛰어나 한방에서는 사물탕의 핵심 약재로 쓰인다.
빈혈, 생리통, 불임증 등 다양한 증상에 활용되며, 비타민 B12와 엽산이 풍부해 과학적으로도 그 효능이 입증되었다.
나물로도 즐길 수 있는 당귀는 여성 건강을 위한 자연의 선물이다.
불고기와 함께 다양한 산나물을 먹을 수 있는 '산나물 고기 굼터'에서는 당귀가 들어간 이색 요리도 등장했다.
바로 베트남 청년들이 선보인 반세오였다.
달콤한 베트남식 반세오에 쌉싸름한 당귀가 더해지자 묘하게 어울리는 맛을 냈다.
◇ 잡초인 줄 알았는데 효능이…곰보배추
곰보배추는 울퉁불퉁한 잎 때문에 과거에는 잡초로 취급받았지만, 지금은 다양한 효능이 알려지며 귀한 약용식물로 주목받고 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에 싹을 틔우는 생명력 강한 식물로, '동생초'라고도 불린다.
냉이, 달맞이꽃, 엉겅퀴와 함께 대표적인 로제타 식물이다.
기관지와 폐 건강에 좋고, 혈액 정화와 골다공증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나물, 국거리, 차, 효소 발효액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향이 강해 생으로 무쳐 먹기보다는 데쳐서 조리하는 것이 좋다.
외형과는 달리 뛰어난 약성을 지닌 곰보배추는 내면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 다시 일어선 영양, 봄의 축제를 열다
잿더미가 되었던 숲에서 다시 일어선 영양. 지난달 열린 '영양산나물 먹거리 한마당'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깊은 산자락에서 자란 산나물을 주제로 열린 이 축제는 자연의 회복력과 인간의 의지를 함께 담아냈다.
'산나물 판매장터'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했고, 모둠전과 발효 막걸리의 따뜻함도 여전했다.
멀리 하남에서 왔다는 한 주부는 다래순을 11상자나 구입했다.
즉석에서 만든 산나물 김밥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였고, '이색 먹거리장터'에도 삼겹살과 영양 산나물을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였다.
교촌치킨과 지역민이 협업한 100년 주막 '영양양조장'도 붐볐다.
양조장 뒤편에는 DJ가 신청곡을 받는 '100년 양조장 은하수 막걸리 장터'도 열려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특히 고기 굼터 한쪽에는 '수익금 전액은 산불 피해 복구 기부금으로 사용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부스를 운영한 사람들은 석보면 농민들이었다. 영양군에서 가장 많은 산불 피해를 본 지역이다.
그들이 수익금을 기부한다니,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번 축제는 단지 먹고 즐기는 자리가 아니었다. 쓰러졌던 숲과 사람들의 회복을 기원하는 위로의 잔치였다.
영양군민들이 온 마음을 담아 준비한 이 축제에는, 다시 푸른 숲이 돋고 따뜻한 마음이 모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봄의 기도가 담겨 있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polpori@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