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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트럼프, 라마포사 그리고 대통령의 품격

기사입력 2025-05-30 08:08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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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유현민 특파원 = 지난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상회담은 여러모로 파격적이었다.

우선 남아공의 내로라하는 프로 골프 선수 어니 엘스와 레티프 구센이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이끄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배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좋아하는 골프를 엮어 환심을 사려는 라마포사 대통령의 포석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이후 줄곧 남아공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파격적이었던 건 라마포사 대통령을 겨냥한 트럼프 대통령의 '기습 공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의 '백인 농부 집단살해' 의혹을 거론하며 자신의 초청으로 백악관 집무실을 찾은 라마포사 대통령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회담장에 생중계 TV 카메라가 돌아가는 데도 이 의혹의 근거라면서 조명까지 낮춰가며 미리 준비한 동영상을 예고 없이 틀더니 출력한 기사 뭉치를 건넸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은 그들(남아공 흑인)이 땅을 빼앗도록 허용하고, 그들은 땅을 빼앗을 때 백인 농부를 살해한다. 그들이 백인 농부를 살해해도 그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며 라마포사 대통령을 압박했다.

방송사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대국 지도자에게 작정하고 공개 모욕을 준 셈이다.

초대 손님에 대한 배려는 물론 상대국 정상에 대한 예의와 대통령의 품격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출력한 기사에 담긴 사진 일부가 남아공이 아닌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촬영됐고 동영상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설명도 잘못된 것으로 추후 확인됐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그러나 라마포사 대통령의 대응은 달랐다. 남아공 현지 언론이 '매복'이라고 묘사한 트럼프 대통령의 기습 초반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진 못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사실관계는 차분하게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과격한 선동을 하는 남아공의 한 야당 대표를 체포해야 한다는 언급에는 "남아공 헌법은 다당제를 보장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흥분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점잖게 응수한 라마포사 대통령에게 외신들은 '쿨한 대응'이었다고 호평했고, 남아공 현지 언론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의연하게 대응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2월 28일 같은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종전안 등을 둘러싸고 고성으로 언쟁을 벌인 끝에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나야 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당신에게는 아무런 협상카드가 없다"고 여러 차례 윽박지르는 장면은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이처럼 리얼리티쇼를 방불케 할 정도로 상대를 압박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외교는 하루 이틀 된 얘기가 아니다.

2021년 퇴임 전까지 16년간 독일을 이끌었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4년 내내 불편한 관계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이후 백악관 집무실을 처음 방문한 메르켈 전 총리의 악수 요청을 무시할 정도로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메르켈 전 총리는 작년 11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201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프란치스코 당시 교황에게 조언을 구한 사실을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채 "정말 중요한 사람들과 근본적인 견해차가 있을 때 어떻게 이를 해결하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금은 고인이 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숙이고, 숙이고, 숙여라"라며 "그러나 부러질 정도로 숙이진 말아라"라고 조언했다고 메르켈 전 총리는 기억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이 메르켈 전 총리의 회고록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 주장에 숙이고 또 숙이되 부러질 정도로 숙이지 않은 라마포사에게서 대통령의 품격을 느낀 이는 적지 않았으리라.

hyunmin623@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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