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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인 1980∼1990년대에는 '삐삐'(무선호출기)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삐삐 보급의 일등공신인 박성득(朴成得) 전 정보통신부 차관이 지난 24일 오후 1시43분께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틈틈이 공부해서 1966년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데 이어 1970년 제5회 기술고시에 합격, 공무원 생활 12년 만에 사무관이 됐다. 이때부터 영등포전화국 기술과장, 청와대 경호통신지원반 근무를 거쳐 1984년 중앙전파감시소장, 1990년 전파관리국장, 1991년 초대 통신정책실장, 1994년 기획관리실장 등 체신부와 정보통신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96∼1998년 정보통신부 차관을 지낸 뒤 한국전산원장, 한국인터넷진흥원 이사장, KT 이사회 의장, 전자신문 대표이사 사장,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이사장,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이사장으로 활약했다.
고인을 오래 지켜본 서영길 전 정보통신부 우정국장에 따르면 고인의 최대 업적은 1980년대 체신부 특수통신과장 시절에 추진한 '삐삐·이동전화 보급'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화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질 때였다. 국가안전기획부 등 보안 관련 기관은 "삐삐를 원격 조정해서 폭발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느냐"고 강하게 반대했다. 서 전 국장은 "당시 고인이 보안 기관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렇게 못하도록 보완 장치를 달겠다'고 설득해서 삐삐와 이동전화 보급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행정고시가 아니라) 기술고시 출신 기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서 전 국장은 평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이사국에 진출해 전전자교환기(TDX)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장비 등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게 한 것도 고인의 업적이다. 1989년 미국이 한국을 통신 분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처음 지정한 뒤 "1990년부터 개방하라"고 압박하자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고인이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뒤 사표를 제출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해 한국은 ITU 이사국에 진출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1989년 프랑스 니스 ITU 회의 당시 베트남 정보통신부 전화국장이던 마이 리엠 쭉(Mai Liem Truc) 전 베트남 정보통신부 장관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베트남은 다른 사회주의 사회주의 국가 대표들의 지지까지 유도해 한국의 예상 밖 이사국 진출을 거들었다. 이에 앞서 1980년 아시아 태평양 통신기구 회의에 참석했다가 한국에 잉여 통신장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마이 리엠 쭉씨와 안면을 튼 덕분이었다. 서 전 국장은 "당시 외교부는 'ITU처럼 비동맹 국가의 입김이 센 곳에서 남북 표 대결을 벌였다간 망신을 당할 수 있다'며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이 밖에도 고인은 시내전화에 3분 단위 요금제를 도입하고, 전파 사용료를 걷어 한국 정보통신 발전의 밑천을 마련했고, 통신정책실장이던 1994년에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기획단장을 맡아 세부 계획을 입안했다.
154㎝ 단신에 업무추진력을 갖춰 중국의 덩샤오핑(1904∼1997)을 빗댄 '박소평'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서 전 국장은 "등소평이 '부도옹'(不倒翁·오뚜기) 아니냐"며 "고인도 도무지 포기를 몰랐고, 남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골라서 솔선수범했기에 '박소평'이라고들 했다. 한번 인연을 맺은 이들을 살피는 것도 남달랐다"고 그리워했다.
아들 박세호(전 SK텔레콤 근무)씨는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할 때 한몫 거들었다고 자랑스러워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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