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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외신을 통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국경 지대 도나우강변의 무인 삼림지대에 세워진 자칭 '베르디스 자유공화국'의 이야기가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2019년 5월, 당시 14세였던 호주 출신 소년이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닌 무주지(無主地)였던 이곳에 건국을 선포하고 영구 정착을 시도했다. 이 소년은 그러나 크로아티아 정부로부터 영구 입국금지 조치를 당해 현재는 영국에 거주한다.
베르디스 자유공화국 같은 '국가'를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 초소형 국가체)라고 부른다.
마이크로네이션은 역사에서 의외로 많다. 대개 장난처럼 여겨지지만, 진지한 목적으로 설립된 곳도 있다. 나아가 이들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국가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기도 한다.
베르디스 자유공화국의 이야기를 계기로 마이크로네이션에 대해 살펴봤다.
◇ 마이크로네이션·마이크로스테이트·비국가 주권 실체 차이점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해리 홉스 교수와 조지 윌리엄스 교수는 '마이크로네이션: 법의 공백'(Micronations: A lacuna in the law·2021)이란 논문에서 마이크로네이션에 대해 "주권 행위를 수행 또는 모방하며, 국가수립 절차를 밟지만, 그 존재에 대한 국내·국제법적 근거가 부족하고 또한 국내외 논의의 장에서 국가로 인정받는 경우 거의 없는 자칭 국가"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주권 행위란 어떤 지역이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거나 국민을 모집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행위를 뜻한다. 또 국가수립 절차는 국기와 국가의 제정, 헌법의 공포, 통화의 발행 등을 말한다.
이 논문은 이런 정의를 바탕으로 마이크로네이션을 분리주의 운동이나 원주민 국가, 마이크로스테이트(microstate.초소형 국가) 등과 구별한다.
분리주의 운동과 원주민 국가는 일정한 역사적 근거에 따라 독립을 요구하지만, 마이크로네이션은 독립을 주장할 역사적 근거가 거의 없다.
또 초소형 국가인 마이크로스테이트는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마이크로네이션과 다르다.
모나코, 리히텐슈타인, 안도라, 산마리노, 바티칸시국과 투발루, 팔라우, 나우루 등과 같은 섬나라가 초소형 국가로 분류된다.
국가로서 형태를 갖추지 못해 초소형 국가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는 '비국가 주권 실체'도 있다.
1048년에 설립된 몰타 기사단(Sovereign Military Order of Malta)은 한때 키프로스, 로도스, 몰타 등을 지배했으나 현재는 물리적 영토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건물 2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107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유엔에서 영구 옵서버 지위를 지니고 있다.
◇ 자유지상주의·관심끌기 등 설립 목적 다양
마이크로네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100여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오랫동안 존속된 마이크로네이션은 1944년 설립된 엘레오르 왕국이다.
덴마크의 왕실 전통과 정부 구조를 패러디하기 위해 덴마크의 엘레오르 섬에 설립된 이 왕국은 매년 일주일간의 축제 기간에만 왕국으로서 유지된다.
앞서 논문에 따르면 마이크로네이션의 설립 요인(동기)은 자유지상주의, 반발행위, 관심 끌기, 국가성 비판, 정치적 저항 등이다.
미국 부동산 재벌 마이클 올리버가 1972년 통가 남쪽 약 250㎞ 해상의 산호초에 세운 '미네르바 공화국'은 자유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사례다. 올리버는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세금과 사회복지 지출이 없는 국가를 만들고자 물속에 잠겨 있던 산호초 위에 호주에서 실어 나른 흙을 부어 영토를 만들었다. 이에 통가는 군대를 파견했고, 결국 올리버와 추종자들은 그해 말 이곳을 떠났다.
'시랜드 공국'도 자유지상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랜드 공국은 1960년대 영국에서 BBC의 라디오 방송 법적 독점권에 불만을 느낀 해적 라디오 방송 운영자 로이 베이츠가 설립했다.
영국군 소령 출신인 베이츠는 서퍽 해안에서 약 11km 떨어진 해군 요새에서 해적 방송을 내보냈다.
이 요새는 당시로서는 영국 영해 밖에 있어 베이츠의 해적 방송이 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1967년 영국 외부 해역의 해양 구조물에서 무단으로 방송하는 행위도 처벌하는 법이 제정됐다.
베이츠는 이에 자신을 이 요새를 영토로 하는 시랜드 공국의 통치자라고 선포하면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체코 정치인인 비트 예들리치카가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무주지에 세운 '리버랜드'는 정부규제와 세금이 없는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를 표방한 마이크로네이션이다.
호주의 지역 관광명소인 '허트강 공국'은 '반발행위'에서 비롯됐다.
1960년대 허트강 유역에서 밀 농장을 운영하던 레너드 케슬리는 1969년 정부의 밀 할당제가 시행되자 그에 반발해 1972년 새로운 국가 창설을 선언했다.
단지 재미나 관심 끌기 차원의 마이크로네이션도 있다.
1989년 11월 뉴질랜드에서 설립된 '황가모모나 공화국'이 그 사례다. 당시 구역 경계 재조정으로 황가모모나 마을이 다른 지역으로 편입되자 라이벌 지역과 함께 럭비팀을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낀 마을 주민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 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는 염소(1999∼2001년)와 푸들(2003∼2004년)이 선출됐다.
'엘가란드&바리가란드 왕국'은 스웨덴 예술가들이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 1992년 설립한 마이크로네이션으로, '국가성 비판' 범주에 속한다.
'게이레즈비언 왕국'은 2004년 호주에서 제정된 동성 결혼 금지법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탄생했다.
자칭 데일 앤더슨 황제가 호주의 무인도에 깃발을 꽂고 독립을 선언했으나 2017년 호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자 왕국을 해산했다.
우리나라에도 마이크로네이션이 있다.
강원도 춘천 남이섬은 2006년 3월 1일 국가개념을 표방하는 특수관광지로서 독립을 선포하면서 나미나라공화국이 됐다.
나미나라공화국은 별도의 국기와 국가를 만들었고 화폐인 '남이통보'와 우표를 발행한다. 또한 문화부·외교부·국방부 장관 등 행정부 요인도 갖췄다.
나미나라공화국은 앞선 논문 저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관심 끌기' 범주로 볼 수 있다.
◇ 국가 승인·인정하는 단일 조약이나 제도 없어
마이크로네이션은 가십성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의 본질이 무엇이고 합법적 통치권은 어디서 비롯하는지 등의 질문을 촉발하기도 한다.
특정 집단을 국가로 승인·인정하는 세계 공통의 단일 조약이나 제도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1993년 제정된 몬테비데오 협약에서 규정한 ▲ 영구적 주민 ▲ 확정된 영토 ▲ 정부 ▲ 다른 국가와 관계를 맺을 능력 등이 국가성을 판단하는 지표로 원용된다.
그러나 이 협약에 대해 국가의 성립요건 기준으로서 불완전하다는 비판이 있다.
이혜영 법학박사의 '국제법상 국가의 성립요건 재고찰'(2018) 논문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성립된 국가 중 대만, 남로디지아,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 등과 같이 몬테비데오 협약상 요건을 충족했음에도 국가성을 확립하지 못한 사례가 등장했다.
반면 콩고, 르완다, 부룬디 등은 몬테비데오 협약상 요건을 충족하지 않지만, 국가성을 인정받고 있다.
예컨대 콩고는 계속된 내전과 중앙정부의 분열, 외세의 개입 등의 상황으로 '실효적인 정부'가 확립됐다고 보기 힘들지만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pseudoj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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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