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 가장 주목받는 인물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의자도 없이 대만 컴퓨텍스 전시장 바닥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지난 달 화제가 됐다.
곧이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일반 시민들이 드나드는 여느 식당에서 '치맥'이나 삼겹살처럼 일상적인 음식을 즐기는 그의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의 CEO인 그의 이런 소탈함이 연출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민자 출신인 그가 미국에서의 경력을 접시닦이로 시작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15살이던 1978년 24시간 운영하는 미국의 중저가 음식점 체인 '데니스'의 설거지 아르바이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손님이 가고 난 테이블을 치우는 '버스 보이'를 거쳐 주문을 받는 웨이터로 '승진'했다.
그는 "나보다 커피잔을 한 번에 더 많이 나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과거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한 그가 지금까지도 지위를 중요시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그는 회사 경영에서 CEO인 자신이 아니라 '임무(미션)가 보스'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직급이 아니라 눈앞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음식점에서 일을 처음 배운 사람다운 경영관이다.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운 곳도 데니스다.
그는 "위기가 닥치면 오히려 심박수가 낮아진다"며 "데니스에서 러시아워를 겪어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는 창업 이후 첫 제품 실패로 파산 위기에 몰렸고, 주가가 90% 가까이 곤두박질치는 일을 두 차례나 겪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다.
그는 밀려드는 주문처럼 쏟아지는 위기 속에서 단련된 인격과 인간성을 인재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2년 전 스탠퍼드대에서 진행한 대담에서는 "위대함은 지능에서 나오지 않고 인격에서 나온다. 그리고 인격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받아본 사람에게서 만들어진다"며 여러분이 고통을 겪기를 바란다는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지난달 방한 때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서도 인재를 보는 기준에 관해 묻자 "지능은 이제 (흔한) 상품이나 다름없다"면서 지능보다도 인간성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선언했다.
특히 그는 "함께할 사람을 구한다면 베풀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는 사람을 찾으라"면서 관대함과 친절함이 진정한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일터에서까지 무한 경쟁이 이뤄지는 실리콘밸리에서라면 의아함을 자아낼 만한 이런 인생관도 조리사와 웨이터, 접시닦이가 '임무'를 보스로 삼아 각자 맡은 일을 해내는 음식점에 대입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물론 지능보다 인간성이 중요하다는 그의 발언은 AI 시대 일자리 대체를 두려워하는 대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쌓기 위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엔비디아의 인사 정책에 이 같은 철학이 실제 녹아 있다는 사실을 숫자 속에서 찾기는 어렵지 않다.
엔비디아는 AI 시대 이후 거대 기술기업의 대량 해고가 이어지던 시기 오히려 직원 수를 지속해 늘렸다고 공시했다.
2024년 2만9천600명 수준이던 직원 수는 2025년 3만6천 명으로, 다시 올해 4만2천 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AI 발전이 가장 두드러진 2년간 연평균 직원 증가율은 거의 20%에 육박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외국인 유입을 막겠다며 기술직 해외 인재 채용의 통로로 주로 사용되는 H-1B 비자 신청에 10만 달러(1억5천만원)의 수수료를 매기자 엔비디아는 이를 전부 회사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그만한 돈을 들여야 했다면 이민자 출신인 본인 가족부터 미국에 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유다.
그 결과 구글과 아마존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H-1B 비자 신청 건수가 절반에서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지만, 엔비디아는 오히려 20% 증가했다.
거대 기술기업들이 'AI 효율화'를 내세워 앞다퉈 사람을 줄이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엔비디아의 칩을 사들이는 시대에 오히려 엔비디아는 사람을 늘리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엔비디아는 '아무도 내일 자기 자리가 남아있을지 알 수 없다'는 실리콘밸리에서 드물게 직원들을 거의 해고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공동창업자이자 첫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지낸 커티스 프리엠은 회사를 떠난 지 16년 만인 2019년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과거 함께 일했던 사람이 여전히 남아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엔비디아는 아예 공시 서류에까지 "엔비디아가 직원들이 평생에 걸쳐 경력을 쌓을 수 있고, 입사한 이후 직원들이 오래 머무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고 명시했다.
엔비디아의 이직률은 2025, 2026 회계연도 기준 각각 2.5%와 3.7%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인사 정책이 온정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뉴요커 기자가 쓴 전기에는 어느 날 격분한 황 CEO가 구내식당에서 열린 사내 워크숍에서 임원 15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핵심 칩 설계 엔지니어를 2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몰아세운 사건이 나온다.
황 CEO 본인도 어느 대담에서 자신이 직원들을 "위대해질 수 있도록 '고문'(torture)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을 만큼 이런 질책은 드문 일이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다른 경영자들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그렇게 소리를 지른 이후에도 그 엔지니어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당시 사건을 목격한 직원은 "젠슨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위축되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며 "그래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러도 용서의 폭이 넓다"고 분석했다.
이런 방식이 모두에게 미담으로 읽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엔비디아 직원들은 고성이 오가는 압박 가득한 분위기를 회사의 그림자로 꼽기도 한다.
엔비디아 출신의 한 엔지니어는 주 7일 근무에 새벽 1∼2시까지 일해야 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강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에 토로했다. 마케팅 분야에서 근무했던 직원은 하루 7∼10회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그중 상당수가 고성과 언쟁으로 번졌다고 증언했다.
직원들이 이직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주식 보상 때문으로, 지급되는 주식의 소유권이 확정될 때까지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이른바 '황금 수갑' 현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과주의 업무 강도나 급여 체계가 다른 실리콘밸리 기업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임을 고려하면 직원을 '고문'하되 내치지 않는 엔비디아의 포용적인 인사 정책은 여전히 예외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포용력의 뿌리도 실은 데니스였다.
황 CEO는 1993년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베리에사로(路)의 데니스 매장에 프리엠·크리스 말러코스키와 함께 죽치고 앉아 무한리필 커피를 마셔가며 엔비디아 창업 구상을 다듬었다.
'엔비디아 발상지' 기념 명판 제막식을 위해 그 데니스 매장을 2023년 다시 찾은 그는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고 누구도 우리를 쫓아내지 않았다"며 그곳이 최적의 창업 장소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음식점을 첫 직장으로 삼으라"며 "그곳에서 겸손함과 근면함, 다른 사람을 환대하는 정신을 배우게 된다"고 젊은이들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최근 기자가 찾아간 베리에사로 데니스 매장은 소위 성지순례객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여타 지점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음식점으로 남아있었다.
방문객들은 친구끼리 또는 어린아이를 낀 가족 단위로 두서넛씩 모여앉아 팬케이크를 자르고 커피를 마셨다.
그 모습을 둘러보며 커피 한 잔을 비우자 곧이어 웨이터가 다가와 잔을 다시 가득 채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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