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수원체육관에서 열린 V리그 현대건설-IBK기업은행전. 세트스코어 0대3으로 패배한 기업은행 김호철 감독이 아쉬워하고 있다. 수원=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25.11.4/
사진제공=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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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 여자배구 지휘봉을 잡은 5번째 시즌. 컵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여자부 첫 봄배구는 물론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꿈꿨다.
하지만 거듭된 악재 속 모두 물거품이 됐다. 찬란한 부활을 꿈꿨던 IBK기업은행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
선수 시절부터 '김호철과 함께라면 현대캐피탈은 우승한다'는 말을 만든 주인공. 이탈리아 세리에A로 진출해 리그 MVP 3번, 챔피언스리그 MVP를 잇따라 수상했고, 우승까지 차지한 화려한 경력. V리그 복귀 이후 '무적함대' 삼성화재의 10연패를 저지하며 2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현대캐피탈 2기 시절에도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팀을 다시 일으켜세운 사나이.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은 2019년, 그는 이미 64세의 고령이었다. 이탈리아에 조용히 머물던 그를 다시 코트로 모신 팀은 기업은행이었다. 2021년말 '풍비박산'이 난 현장 수습을 맡겼다. 여자배구 첫 도전이었다.
조송화-김사니 항명사태와 타 팀 사령탑들의 악수 거부 등 후폭풍이 이어지며 어수선 했던 배구계를 위한 결단이었다. 매일 답답한 기사만 쏟아지던 상황, 김호철 감독의 용단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배구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자부 사령탑을 맡은 그는 과거에 비해 웃는 얼굴을 자주 보여주며 '호요미(호철+귀요미)'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부진한 날은 어김 없이 레이저빔을 쏘곤 했다. 특히 선수들에게 "차라리 들이박아서 상대와 함께 기절을 해라. 프로라면 싸움닭 같은 모습이 있어야 한다"며 투지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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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배구 시절에는 복장 규정도 있고 해서 정장 차림을 고집했는데, 기업은행에서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자주 코트에 섰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던 팀 사정상 선수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김하경 육서영 최정민 등 김호철 체제에서 집중 조련을 받은 선수들은 그를 '두번째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모 기업도 김호철 감독의 지휘 하에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팀의 주축을 이루던 김수지 신연경 김희진 등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황민경 이소영 이주아 등 거물급 FA들이 차례로 합류했다. 2024년 3월에는 김호철 감독과 2+1년 연장계약까지 맺었다.
김호철 감독은 첫 시즌 이후 시종일관 외국인 세터에 초점을 맞췄다. 2023~2024시즌에는 태국 세터 폰푼, 2024~2025시즌에는 중국 세터 천신통을 영입했다.
탈 아시아급 공격수로 성장한 메가의 정관장을 비롯한 타 팀들은 주로 아시아쿼터로 날개 공격수들을 영입해 재미를 봤다. 반면 기업은행은 외국인 세터들이 팀에 녹아들지 못했고, 두 선수 모두 봄 배구와 멀어진 뒤 시즌이 끝나기 전에 짐을 싸 고국으로 돌아갔다. 2024~2025시즌 전반기까지 봄배구를 노크했지만, 4라운드 전패, 후반기 12경기 1승11패로 추락하며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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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시즌을 앞두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듯 아시아쿼터로 킨켈라를 영입해 '쌍포 배구'를 구상했고, '최고 리베로' 임명옥을 영입해 한층 더 수비진을 강화했다. 컵대회 우승 때만 해도 기대가 현실로 나타나는듯 했다. 미디어데이에선 모두가 IBK기업은행을 우승후보 1순위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소영이 또 다시 부상을 당하며 끝내 계약해지로 팀을 떠났고, 외국인 선수 빅토리아와 킨켈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주전 세터 김하경마저 발목 부상으로 이탈했다.
지난 19일 도로공사전에서 패하며 6연패의 늪에 빠지자 김 감독은 구단에 사퇴 의사를 전했다. 구단은 시즌 종료까지 팀을 이끌어줄 것을 제안했지만 수렁에 빠진 팀의 재정비를 위한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는 사령탑의 입장이 완강했다. 김호철 감독은 22일 현대건설전 마저 패배, 7연패를 기록한 뒤 곧바로 선수단과 작별 인사를 하고 팀을 떠났다.
여오현 감독대행. 사진제공=KOVO
기업은행은 여오현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차후 새로운 사령탑에 대해서는 최대한 신중을 기한다는 입장이다.
2라운드도 채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시즌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 변수. V리그의 경우 최근 흥국생명이나 KB손해보험 등이 시즌중 거물급 외국인 사령탑을 영입해 반전을 이룬 사례도 있다. 하지만 기존 사령탑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자진 사퇴했고, 팀이 최하위로 처진 상황인 만큼 새로운 감독을 영입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인 만큼 대행 체제로 올시즌을 마칠지, 시즌 중 새로운 감독을 영입할지 등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고민할 전망이다.
김호철 감독은 "믿고 지지해준 구단과 성원해주신 팬들께 죄송하다. 팀은 떠나지만 늘 응원하겠다"는 속내를 전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어려울 때 와주신 데 대해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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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첫해 평소처럼 불호령을 내렸다가 국가대표까지 지낸 베테랑 선수가 울음을 터뜨리자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 있을 만큼,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 스타일이 여자배구의 현실과 잘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애써 스스로를 억누르며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거듭된 선수들의 부상에 발목이 잡혔다.
1955년생인 김호철 감독은 올해로 70세다. 차후 코트로 다시 돌아오기엔 쉽지 않은 나이다. 어쩌면 마지막 도전으로 남을 수도 있기에, 레전드의 쓸쓸한 뒷모습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