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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언더핸드스로 투수 주동식(65). 젊은 팬들에게는 다소 희미해진 이름이지만, 올드 팬과 타이거즈 팬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이름이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2년째인 1983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2년 간 뛰며 타이거즈의 첫 우승을 함께 했다.
해태 시절 야구인들과는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월 오키나와 한화 캠프를 찾아가 김응용 감독, 김성한 수석코치 등과 함께 식사를 했고, 김성한 수석코치가 광주에서 운영중인 중국음식점에 세 번 정도 간 것 같다고 했다. 주동식은 "코치 시절 함께했던 포수 최해식이 술을 먹으면 꼭 전화를 한다"며 웃었다. 지난해 광주를 찾았을 때 새 경기장 둘러본 그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주동식은 지금도 한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불편한 일이 많았을 것 같다'고 하자 주동식은 "외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적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귀화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는데 '아빠 죄송해요'라면서 생활이 불편해 귀화를 하겠다고 해 말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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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연봉은 1000만엔. 당시 수준에서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런데 가족을 도쿄에 두고 와 두집 살림을 하다보니 돈을 모으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해태 시절 무엇보다 그를 분개하게 한 것은 보너스를 주지 않으려는 구단 행태였다. 구단은 1983년 전기리그에서 7승을 거둔 주동식을 후기리그 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마운드에 올리지 않았다. '던지고 싶다'고 하며 "넌 한국시리즈 때 쓰려고 아껴두려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주동식은 첫 해를 7승으로 마감했다. 전기리그에서 7승을 기록했는데, 후기리그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는 "10승을 거두면 보너스를 받기로 계약이 돼 있었다. 구단이 이 보너스 지급이 아까워 등판을 막은 것이다"며 웃었다.
그해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을 하면 수훈선수들의 연봉은 당연히 인상이 되어야 하는데, 해태는 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이때 주동식을 비롯한 선수들이 함께 나서 구단과 싸웠다고 한다.
주동식은 1983년 30경기에 등판해 7승7패3세이브 평균자책점 3.35. 1984년 18경기에 나서 6승5패,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재일교포 선수들은 일본의 선진야구를 국내야구에 전수, 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한국어가 서툰 '반쪽바리'소리를 듣는 등 설움을 겪어야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계라고, 한국에서는 일본 출신이라고 수근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대구 원정 경기 때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호텔로비에서 울면서 '차별하지 마라'고 외쳤다. 그 때 로비에는 해태 선수는 물론, 일반인들도 많았다. 모두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2년 간의 해태 선수 생활은 그의 야구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주동식은 "당시에는 한국에 간 걸 굉장히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소중했던 경험이고 추억이었다. 난 버럭 화를 냈다가도 안 좋았던 일은 금방 잊어버린다. 다른 한국인 처럼 말이다"며 웃었다.
그가 선수로 뛰었던 1980년대 초에는 한국과 일본야구의 수준차이가 컸다. 그러나 지난 30년 간 한국야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일본을 바짝 따라잡았다. 주동식은 "한국야구는 메이저리그의 파워와 일본야구의 세밀함을 모두 갖춘 것 같다. 아주 재미있게 한국야구를 보고 있다"고 했다.
도쿄=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