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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40)을 보면 금방 떠오르는 속담이다.
돌이켜보면 그는 의미 있는 홈런을 쳤을 때마다 흥을 마음껏 분출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23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장외 홈런 때가 대표적이다. 6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한 그는 팀이 9-3으로 앞선 8회초 1사 1루에서 140m 대형 홈런을 쳤다. 롯데 루키 조현우를 상대로 사직구장 역대 7번째 장외 홈런을 날렸다. 하지만 이 때도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어떠한 세리머니도 없었다.
류 감독의 말대로 야구의 꽃은 홈런이다. 팬들에게 꽃을 선물했으니, KBO리그 문화 틀 안에서 잠시 즐겨도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이승엽은 누구보다 빠르게 베이스를 돈다. 강한 파열음과 함께 날아가는 타구를 끝까지 지켜보는 일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투수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서이다.
이승엽의 생애 첫 홈런은 1995년 5월 2일 광주 해태 타이거즈전이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 아홉살의 신예가 까마득한 선배 이강철의 커브를 잡아 당겨 담장을 넘겼다. 당시에도 이승엽은 고개를 푹 숙이고 쏜살같이 베이스를 돌았다. 그 때는 "광주구장 팬들이 너무 조용했다. 빨리 돌아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는 게 훗날 밝힌 이유다. 지금은 다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대구=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