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도',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도다

기사입력 2015-09-09 08:04



[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아비가 아들에게 칼을 내던지며 자결하라 명한다. 자식이 아비를 죽이려했으니 가장으로서 응당 내려야 할 처분이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야." 아비는 분노에 몸을 떨고 아들은 울부짖는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비정한 아비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직접 쇠못을 박는다.

영화 '사도'는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8일 만에 숨진 임오화변을 정치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가족사로 재조명한 작품이다. 사도가 좁고 어두운 뒤주 안에서 서서히 사그라져 가는 8일간의 기록 사이로 과거의 사건이 교차하면서 현재와 과거가 서로 대화하듯 촘촘하게 직조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아비는 아들을 죽여야만 했나.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몸을 담근 부자(父子)의 비극적 운명의 인과관계는 가혹하고 처연하다.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를 끔찍이도 아꼈다.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세자로 책봉했고 손수 책을 만들어 가르쳤다. 사도의 총명함은 영조를 흐뭇하게 했다. 그러나 사도가 타고난 기질은 영조의 기대 밖으로 점점 벗어난다. 자유롭고 진취적인 사도는 학문보다는 무술과 그림에 심취하고,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강요하는 영조와 점점 갈등을 빚게 된다. 대리청정과 다섯 차례의 양위파동을 겪으며 부자의 갈등은 봉합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만다.

영조는 천한 무수리에게서 태어났다는 콤플렉스 속에 재위 내내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다. 양위파동으로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했다.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영조로 인해 사도는 고통받았다. 천둥 같은 호통과 폭언 속에도 세자로서 최선을 다하려 했던 사도는 울화와 절망감에 몸부림치다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 간다.

결국엔 결핍의 대물림이다. 출신과 정통성에 대한 영조의 결핍, 세자로서 아들로서 인정받지 못한 사도의 결핍. 부자는 서로에게서 싫어하는 부분을 가장 많이 닮았다. 이것이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의 문제다. 아들은 아비의 거울이다. 영조는 사도에게서 자신이 가장 감추고 싶었던 상처와 흠결을 발견했을 것이다. 결핍은 날선 칼날이 되어 부자를 겨눴다. "너의 존재 자체가 역모다." 영조는 그렇게 천륜을 끊어냈다.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헤집어 보고 또 헤집어 봐도 심연의 끝을 알기가 어렵다. 이준익 감독은 간결하지만 힘 있는 연출로 그 끝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다. 걸음걸음마다 눈물이 맺힌다.

송강호와 유아인의 격렬한 충돌 에너지는 스크린을 비장미로 가득 채운다. 극의 갈등과 긴장이 정점에 달하면, 두 배우가 주고 받는 연기 호흡에 숨이 멎는다. 곧 이어 전율이 온 몸을 타고 흐른다.

송강호는 왜 그가 명배우인지 다시 한번 증명한다. 40대에서 80대까지 40년의 세월을 오간 송강호의 연기는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연기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무궁무진하게 남았다는 사실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영조가 숨진 사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에선 울음 속에 대사가 뭉개져 들리지만, 그래서 더 짙은 회한이 전해진다.


'베테랑'으로 껍질을 깨고 나온 유아인은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했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는 공허한 읊조림 안에도 수만가지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생모 영빈의 뒤늦은 회갑연을 치른 뒤 궁궐 후원에서 행차를 하며 울부짖는 장면에서 유아인의 에너지와 광기가 폭발하는데, 가슴에 쇠못이 박힌 사도의 원한이 고스란히 관객을 덮친다.

영조는 사도가 죽은 뒤,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棹)',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너를 생각하며 슬퍼하노라." 지독한 회한. '사도'라는 시호는 비정한 부정(父情)의 다른 표현이다.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도다. 슬픔의, 여운의 그림자가 참으로 길고도 짙다.

suza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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