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일제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일본의 혼과 서양의 실용을 결합하자는 기치 아래 근대국가의 길로 내달렸다. 그 결과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무모한 전쟁 끝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아 수십만 명의 인명이 희생된 것 이외에도 '미나마타병'으로 대표되는 전례 없는 공해와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 같은 '묵시록적 사건'을 되풀이해 겪고 있다.
재일 한국인 최초 도쿄대 정교수, 도쿄대 현대한국연구센터장, 세이가쿠인대 총장을 거쳐 구마모토현립극장 관장 겸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사계절)을 통해 '왜 일본에서 인류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2016년 1월부터 2017년 9월까지 교도통신에 연재한 '강상중 사색의 여행 1868년부터'를 묶어낸 '유신의 그림자(維新の影)'가 2018년 일본에서 출간됐고 이번에 한글로 번역돼 나온 것이 이 책이다.
저자는 군함도와 미이케 탄광에서 아시오 광독(鑛毒) 사건이 벌어진 야나카무라, 대도시의 슬럼과 미군기지에 짓눌린 오키나와와 코리아타운에 이르기까지 일본 근·현대사 격동의 현장을 누비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걸어온 근대화의 길과 그것이 초래한 부작용을 14개의 주제로 풀어낸다.
'군함도'로 불렸던 나가사키현 하시마 탄광을 돌아본 저자는 "바다 아래 600m 깊이까지 내려가 오로지 석탄을 캐고 나르던 광부에게 일상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가혹한 노동을 견뎌냈을까"라고 자문한다. 볕이 잘 들고 전망도 좋은 빌딩 상층부나 섬 중앙의 고지대에는 상급자와 임원이, 하층부에는 광부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구조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 그는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부국강병, 풍요와 번영, 발전과 성장이라는 일본의 꿈이, 그러나 그 반대였던 가혹한 현실이 응축돼 있다"고 소회를 남긴다.
군함도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인 석탄 채굴을 상징한다면 후쿠시마는 '국책민영의 꽃'인 원자력 발전을 상징한다. 도쿄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발전소 사고로 머나먼 후쿠시마와 인근 지역 주민이 수없이 목숨을 잃거나 집과 생계의 터전을 등진 채 피난민으로 전전하고 있다. 저자는 "눈에 보이는 탄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까지, '에너지가 곧 국가다'라는 국책이 걸어온 길에는 수많은 사람기둥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1980년대 중반 재일 한국인 최초로 지문 날인을 거부하는 등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저자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역과 사회, 국가와 공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함께 살아가고 싶다. 민족을 넘어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가와사키의 코리아타운에 일본과 재일 한국인·조선인, 그리고 그 외 국적이나 민족의 외국인이 함께 사는 장이 만들어진 것도 이 같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애를 썼을지…"라고 말끝을 흐린 저자는 지금 코리아타운에 혐한 시위의 파도가 몰아닥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저자는 "헤이트 스피치는 일부의 풀뿌리 배외주의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리아 포비아'라고도 할 만한 혐한류의 확대는 아이러니하게도 한류 열풍과 결합해 '한국성·조선성'을 돋보이게 했다"고 진단한다.
저자가 보기에 메이지유신 이후 가장 달라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일본의 정치다. 1994년 이른바 '정치개혁 4법'을 제정한 뒤 오히려 주권을 위임한 국민과 그것을 위임받은 정치가 사이의 골은 이전보다 더 깊어졌다. 금권 부패와 파벌 정치의 폐해를 없애고 깨끗한 선거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자금의 운용과 인사 발탁의 기능이 정당 지도부에 집중되다 보니 여당 총재인 총리가 의회 해산권을 행사하거나 정책을 걸고 선거의 초점을 하나의 쟁점으로만 돌리는 등 대중의 정서를 이용하는 '유사 독재적 민주정치'가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6년 중의원 선거 이후 역대 총리 10명 중 8명이 정치가 집안 출신이다. 지반(地盤·지원 조직), 간판(지명도), 가방(자금) 등 세 가지 자산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집권 자민당 중의원 의원의 세습률은 30%가 넘는다
저자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와 역시 만주국 괴뢰정부의 막후 총리로 불리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역사의 '귀태(鬼胎)', 즉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지칭해 논란을 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책 한국어판 서문에서 "메이지 국가를 영광의 시대로 칭송하며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귀태의 아이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은 지금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의 생리를 버리지 못했다"고 썼다.
노수경 옮김. 228쪽. 1만3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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