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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닷컴 김수현기자] 장미화가 어마어마한 빚을 진 전남편의 채무를 대신 갚았다 회상했다.
그 시대 때 9500만 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도대체 얼마냐"라 놀라워 했고 혜은이는 "돈도 크지만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 도망간 계주를 언니가 너무 예뻐했다. 언니는 그 계주의 은인이었는데"라 했다.
장미화는 "(그 계주) 결혼을 내가 시켜줬다. 연을 맺어줬었다. 근데 그렇게 하더라. 그 이후에 이혼을 했다"라 했고 혜은이는 "언니를 죽게 만들었다"라 말을 보탰다. 박원숙은 '사과를 받았냐'는 말에 "무슨 사과냐. 돈을 줘야 한다"라며 대신 화를 냈다. 장미화는 "너 이거 보면 얼마라도 갚아라. 나 요즘 살기가 너무 힘들다. 4년을 굶고 있다. 나 방송 밖에 못한다. 너라도 몇 푼 보내봐라. 혜은이하고 나하고 살아야 한다"라 영상편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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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거 시간 맞춰 가다가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 그 사고로 허리뼈가 앞으로 살짝 밀렸다. 근데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파서 누워있는데 와서 돈 달라고 하더라. 선입금 받은 행사비를 환불해 달라는 거다"라 한탄했다.
행사 때 얼마 벌었냐는 말에 장미화는 "탑이었다. 70년대 '안녕하세요' 활동 당시 통행금지로 최대 세 군데 공연을 했는데 한 업소에서 한 달에 90만 원이었다. 그 시절엔 330만 원이면 개인주택을 하나 샀다. 난 270만 원을 벌었는데 지금은 그 돈이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다"라 한숨 쉬었고 박원숙은 "혜은이나 장미화나 다 똑같이 '그 돈 어디갔냐' 한다"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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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화는 "내가 업소에 가서 노래를 해야 돈을 버니까 고추장 단지, 오징어다리 날아오고 신물이 난 거다. '에라. 시집이나 가자'가 된 거다"라며 "결혼하고 1년 후 아이를 낳고 2년 살다가 아이가 3살 때 이혼했다. 도저히 먹고 살수가 없었다. 아들을 시댁에서 장손이라는 이유로 데리고 갔는데 죽어도 아이는 못 주겠더라.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남편의 빚을 내가 갚기로 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라 털어놓았다.
장미화는 "아들이 크면서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라서 미안했다. 아들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 그래서 아이아빠와 친구로 지냈다. 아들과 전남편을 이어주기 위해 좋은 날이면 가족끼리 모여서 밥도 먹었다. 세 사람이 만나면 아들이 너무 행복해 했다. 근데 딱 한 번 나한테 '아빠랑 합칠 생각 없을까?'라 묻더라. 그래서 '난 너희 아빠하고는 못 살아. 이대로가 편하다'라 답했다"라 고백했다.
당시 전남편 빚이 2억 8000만 원이었다고. 장미화는 "그돈을 갚는데 그까짓 밥값을 내가 안내겠냐. 밥 얻어먹었다는 말 듣기 싫었다. 이자로만 쳐도 죽을 때까지 얻어먹어야 하는데. 빚을 갚으려고 폐가 무너지도록 뛰었는데 친구로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근데 아들이 아버지랑 많이 친해지더라. 나 모르게 아버지 생일을 챙겼더라. 그걸 나중에 알았는데 섭섭하더라"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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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화가 미국에 있을 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 혜은이는 "문상을 갔는데 상주가 아무도 없는 거다. 근데 강부자 선생님이 3일 동안을 상주를 하셨다. 그게 감동이었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장미화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911 테러가 있었다. 한공편이 없어서 귀국하는데 닷새나 걸렸다. 난 우리 엄마 임종을 못봤다. 자식이 나 하난데. 그게 참 한이다"라 속상해 했다. 6.25 전쟁 때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 장미화는 "내 위로 언니들이 6명 있었다더라. 근데 다 죽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언니들은 다 죽고 나만 살았다. 돌아가시기 전날 통화에서 어머니가 '후~' 하는 한숨소리를 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라 했다.
장미화는 "난 이다음에 갈 때 우리 아들한테 그런 아픔을 남기고 가지 말아야겠다 싶다. 사는 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아들을 볼 때 제딴에는 편안하게 웃고 그러지만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을 거다. 가슴이 많이 아프다"라며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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