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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닷컴 김수현기자] 장미화가 어마어마한 빚을 진 전남편의 채무를 대신 갚았다 회상했다.
9일 방송된 KBS 2TV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이하 '같이 삽시다')에서는 원조 디바 '왕언니' 장미화가 자매들(박원숙, 혜은이, 안소영, 안문숙)을 찾아왔다.
그 시대 때 9500만 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도대체 얼마냐"라 놀라워 했고 혜은이는 "돈도 크지만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 도망간 계주를 언니가 너무 예뻐했다. 언니는 그 계주의 은인이었는데"라 했다.
장미화는 "(그 계주) 결혼을 내가 시켜줬다. 연을 맺어줬었다. 근데 그렇게 하더라. 그 이후에 이혼을 했다"라 했고 혜은이는 "언니를 죽게 만들었다"라 말을 보탰다. 박원숙은 '사과를 받았냐'는 말에 "무슨 사과냐. 돈을 줘야 한다"라며 대신 화를 냈다. 장미화는 "너 이거 보면 얼마라도 갚아라. 나 요즘 살기가 너무 힘들다. 4년을 굶고 있다. 나 방송 밖에 못한다. 너라도 몇 푼 보내봐라. 혜은이하고 나하고 살아야 한다"라 영상편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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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화는 "남편이 사업을 다 망했다. 사업을 계속 늘렸다. 개업 때마다 혜은이가 왔다. 이거 했다 망하면 또 개업, 지인들에게 빚져서 남편 사업 자금을 마련해줬다. 그래서 내가 빚을 갚기 위해 하루에 12군데 무대를 뛰기도 했다. 6시에 나와서 새벽 4시까지 일했다. 1년 내내 365일을 일했다. 업소 12군데를 다니려면 신호 하나 걸리면 무대 하나 펑크다"라 회상했다.
이어 "그거 시간 맞춰 가다가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 그 사고로 허리뼈가 앞으로 살짝 밀렸다. 근데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파서 누워있는데 와서 돈 달라고 하더라. 선입금 받은 행사비를 환불해 달라는 거다"라 한탄했다.
행사 때 얼마 벌었냐는 말에 장미화는 "탑이었다. 70년대 '안녕하세요' 활동 당시 통행금지로 최대 세 군데 공연을 했는데 한 업소에서 한 달에 90만 원이었다. 그 시절엔 330만 원이면 개인주택을 하나 샀다. 난 270만 원을 벌었는데 지금은 그 돈이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다"라 한숨 쉬었고 박원숙은 "혜은이나 장미화나 다 똑같이 '그 돈 어디갔냐' 한다"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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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화는 "내가 업소에 가서 노래를 해야 돈을 버니까 고추장 단지, 오징어다리 날아오고 신물이 난 거다. '에라. 시집이나 가자'가 된 거다"라며 "결혼하고 1년 후 아이를 낳고 2년 살다가 아이가 3살 때 이혼했다. 도저히 먹고 살수가 없었다. 아들을 시댁에서 장손이라는 이유로 데리고 갔는데 죽어도 아이는 못 주겠더라.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남편의 빚을 내가 갚기로 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라 털어놓았다.
장미화는 "아들이 크면서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라서 미안했다. 아들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 그래서 아이아빠와 친구로 지냈다. 아들과 전남편을 이어주기 위해 좋은 날이면 가족끼리 모여서 밥도 먹었다. 세 사람이 만나면 아들이 너무 행복해 했다. 근데 딱 한 번 나한테 '아빠랑 합칠 생각 없을까?'라 묻더라. 그래서 '난 너희 아빠하고는 못 살아. 이대로가 편하다'라 답했다"라 고백했다.
당시 전남편 빚이 2억 8000만 원이었다고. 장미화는 "그돈을 갚는데 그까짓 밥값을 내가 안내겠냐. 밥 얻어먹었다는 말 듣기 싫었다. 이자로만 쳐도 죽을 때까지 얻어먹어야 하는데. 빚을 갚으려고 폐가 무너지도록 뛰었는데 친구로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근데 아들이 아버지랑 많이 친해지더라. 나 모르게 아버지 생일을 챙겼더라. 그걸 나중에 알았는데 섭섭하더라"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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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화가 미국에 있을 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 혜은이는 "문상을 갔는데 상주가 아무도 없는 거다. 근데 강부자 선생님이 3일 동안을 상주를 하셨다. 그게 감동이었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장미화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911 테러가 있었다. 한공편이 없어서 귀국하는데 닷새나 걸렸다. 난 우리 엄마 임종을 못봤다. 자식이 나 하난데. 그게 참 한이다"라 속상해 했다. 6.25 전쟁 때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 장미화는 "내 위로 언니들이 6명 있었다더라. 근데 다 죽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언니들은 다 죽고 나만 살았다. 돌아가시기 전날 통화에서 어머니가 '후~' 하는 한숨소리를 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라 했다.
장미화는 "난 이다음에 갈 때 우리 아들한테 그런 아픔을 남기고 가지 말아야겠다 싶다. 사는 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아들을 볼 때 제딴에는 편안하게 웃고 그러지만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을 거다. 가슴이 많이 아프다"라며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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