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힘든 시간 보내면서 바닥을 치니까 눈이 떠진 것 같아요."
정조국은 올시즌 20골을 터뜨리며 2013년 K리그 클래식 출범 후 최초 20골 이상 기록한 득점왕이 됐다. 2016년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최우수선수(MVP) 트로피도 거머쥐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그 동안 K리그 MVP는 우승팀 또는 준우승팀 선수들의 전유물이었다. 약체로 분류되는 광주에서 득점왕을 달성한 것도 기적인데 MVP까지 차지했다. 그렇게 정조국은 화려한 부활포를 쏘아 올렸다.
16일 서울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정조국을 만났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는 "어휴 시즌이 끝나니까 더 바쁘네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 그럼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
겁 없던 10대 스트라이커
통상 고교 졸업 후 대학 무대에 진출하지만 정조국은 달랐다. 프로 출사표를 던졌다. 2003년 졸업과 동시에 안양LG(FC서울의 전신)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 데뷔와 동시에 무대를 평정했다. 정조국은 그 해 리그 32경기에 출전해 12골-2도움을 기록했다. 당연히 신인상도 그의 몫이었다.
|
탄탄대로 일줄 알았는데…
정조국은 한국 축구를 책임질 대들보로 성장했다. 스트라이커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 정조국은 2006년 1월 아랍에미리트와의 평가전을 통해 A대표팀 데뷔를 했다. 정조국은 "그 때까지만 해도 난 당연히 A대표팀에 뽑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A대표팀과는 뭔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정조국은 A매치 데뷔전부터 2011년 6월 세르비아와의 평가전까지 6년간 A매치 13경기에 나섰지만 4골에 불과했다. 그 중 3골은 2006년 대만전에서 몰아넣었다.
야심차게 도전했던 프랑스 무대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정조국은 2010년 프랑스 리그1 오세르에 입단했다. 이적 첫 시즌 15경기 2골에 그쳤다. 2011년엔 낭시로 팀을 옮겨 20경기에 나섰지만 2골에 불과했다.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어요."
|
긴 터널
이후 정조국은 군 입대를 위해 국내로 복귀했다. 2012년 서울을 거친 뒤 안산 경찰청에서 뛰었다. 정조국은 안산에서 두 시즌간 36경기 16골을 넣으며 준수한 활약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정조국은 화려한 부활을 꿈꿨다.
2014년 제대 후 다시 입은 서울 유니폼. 낯설었다. 과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시스템과 달랐다. 정조국은 더 이상 '기둥'이 아니었다. "그런 기분을 처음 느꼈던 것 같아요. 뭔가를 보여줘야 하고 쫓기는 듯한 느낌이었죠."
정조국이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제가 이겨내지 못했어요." 뜻 밖의 고백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정조국이다. 자신감 하나로 숱한 경쟁을 버텨왔던 그가 '이겨내지 못했다'고 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조국은 "따지고 보면 제가 기회를 못 받았던 것도 아니에요. 2014년이야 제대했던 시기지만 2015년엔 11경기 출전했거든요. 결국 다른 건 없죠. 제가 못 보여준 거죠."
축구 인생에서 벤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팬과 동료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그였다. 그랬던 정조국이 그라운드를 바라만 봐야 했다. 그에겐 '상처'였다. "솔직히 이런 말 안 하는데 지난 시즌처럼 힘들었던 적이 없어요. 받아들이기 어려웠죠."
|
깊어지는 골 그러나 뜻밖의 반전
정조국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감았다. 주마등처럼 그의 2015년이 스쳐갔다. 후회를 모르는 성격이지만 미처 지우지 못한 한 조각 아픈 기억이 있다. 아내 김성은씨와의 다툼이다. 정조국은 "지난 시즌 서울에서 잘 풀리지 않으면서 아내와의 다툼도 잦아졌어요. 전 힘든 일을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푸는 스타일인데 아내는 그게 답답했던 것 같아요. 아내 성격이 워낙 밝고 좋아서 잘 안 다투는데…"라며 잠시 공백을 둔 뒤 "그 때 제일 많이 싸웠죠. 저 때문에 아내가 고생이었죠"라고 했다.
주전 경쟁에서 밀리면서 사랑하는 아내와도 갈등을 겪던 정조국.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일인데 그게 잘 안됐으니까…."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아들 태하의 한 마디였다. "아빠는 왜 안 뛰어?" 사실 정조국은 누구에게도 대놓고 '지적'을 받은 적이 없다. 아내조차 자존심 강한 그에게 축구와 관련된 '쓴 소리'만큼은 하지 않는다. 그 불문율을 아들이 돌직구 한마디로 산산조각을 냈다. "그러니까요. 태하가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
결심 그리고 부활
아들의 한 마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조국은 "그 말이 저를 깨웠어요"라고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정조국은 광주행을 결심했다.
지난 겨울 정조국은 서울을 떠나 광주에 둥지를 틀었다.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실력으로 잠재웠다. 펄펄 날았다. 정조국은 "이젠 과거와 같이 '내가 잘 해서' 이런 생각이 없어요. 저를 믿어주신 남기일 감독님과 희생, 헌신해준 동료들 덕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득점왕, MVP 수상을 떠나서 떳떳한 남편, 멋진 아빠가 됐다는 사실에 제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요"라고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놨지만 욕심나는 게 있었다. A대표팀이다. 정조국은 "사실 우즈벡전 앞두고 선발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라면서 속내를 살짝 보여준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안 뽑히면 마음이 흔들리고 불만도 있었을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라고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모든 선수들의 꿈은 국가대표 아닙니까. 저도 그 꿈은 놓지 않을 거에요"라며 목표임을 숨기지 않았다.
패기 넘치던 10대 공격수가 어느 덧 선수생활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정조국은 "B급 지도자 자격증 교육을 받고 있어요. 그리고 축구 행정도 공부하고 싶어요. 축구 현장과 행정 중 아직 길은 정하지 못했어요"라며 "여기저기서 목소리 좋으니 해설 해보라는 이야기도 하던데요"라며 웃었다.
웃음도 잠시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데 아직 축구화 벗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선수 생활 오래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아직 자신 있거든요. 저 안 죽었어요."
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