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드니올림픽 제자, 김도균 감독과 설기현 감독의 명승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이들을 돕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정해성 감독(62)의 귀국 후 일성은 K리그 후배 지도자들의 명승부에 대한 흐뭇함과 아낌없는 찬사였다.
정 감독은 지난달 베트남 프로축구 V리그1 호치민시티와 결별했다. 공식 계약기간이 1년 남았지만 마지막 3경기를 2승1무, 리그 5위로 마무리한 뒤 자진사퇴를 선언했다. 2018년 12월 호치민시티 감독으로 부임한 후 지난해 팀사상 최고의 성적,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고, 슈퍼컵 준우승, 내셔널컵 3위에 오르며 V리그 올해의 감독으로도 선정됐다. 그러나 코로나19 시대, 외국인 감독의 삶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지난 7월 구단 회장이 별안간 경질 통보를 한 지 몇 주만에 사과와 함께 정 감독을 재선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즌을 잘 마무리한 후 정 감독은 아름다운 이별을 택했다.
그렇게 지난달 25일 1년만에 귀국한 정 감독이 14일의 자가격리 중 TV로 처음 만난 K리그 경기가 지난달 29일 수원FC와 경남FC의 승격 플레이오프였다. 경남이 1-0으로 앞서가던 후반 추가시간 안병준의 페널티킥 동점골이 터지며 양팀은 1대1로 비겼다. '순위 어드밴티지' 규정에 따라 정규리그 2위 수원이 3위 경남을 제치고 K리그1 승격의 기쁨을 누렸다.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 출신인 정 감독은 이 극적인 승부의 전 과정에 주목했다. 김도균 수원FC 감독과 설기현 경남 감독은 정 감독이 수석코치로 있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팀 멤버다. 정 감독은 "당시 김 감독은 주장이었고, 설 감독은 주전 공격수였다. 그리고 딱 20년만에 이들이 지도자로 만난 경기를 보게 됐다. 둘이 붙었는데 경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며 흐뭇해 했다. "3년간 경험한 베트남 축구와의 확연한 차이도 새삼 느껴졌다"고 했다.
정 감독은 이날 추가시간 페널티킥 장면에서 보여준 주심의 결단과 이후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 상황에서 보여준 양 감독의 품격을 언급했다. "김종혁 심판의 PK 판정은 놀라웠다. 리와인드해보니 뒤에 빠져들어가는 선수를 잡아채서 넘어지는 장면이 보였다. 그 큰 경기에서 그걸 봤다는 것, VAR을 통해 명확하게 집어내는 것을 보면서 차이를 실감했다"고 했다. "더 큰 것은 그 다음이었다. 설 감독이 심판 판정을 인정하고 승복하는 모습을 보고 시대가 바뀌었음을 절감했다"고 털어놨다. "예전 같았으면 싸우고 난리가 날 일이다. 승격을 결정짓는 마지막 큰 경기, 축제같은 그 경기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했다는 것이 놀랍고 정말 감명 깊었다. 내가 설 감독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 승패에 죽고 살던 기성세대 감독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내가 있던 베트남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고 했다.
호치민 지휘봉을 내려놓자마자 현지 복수의 팀에서 러브콜도 있었다. 현장 복귀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하지만 정 감독은 "한국에 들어와 처음 그 경기를 보면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다"고 했다. "이 멋진 감독들과 경쟁하는 것보다, 내가 이 후배 감독들을 도와주는 입장에서 일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됐다"고 했다. "심판이나 외부환경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하는 후배들이 없도록 축구계를 더 바르고 공정하게 만드는 일, 이 후배들에게 힘이 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치열하게 결정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한편으론 '우리도 이제 많이 성숙했구나' 라는 생각에 기뻤다"며 미소 지었다. "축구인으로 살면서 늘 그랬듯 어디서 언제 어떻게 기회가 올지는 모르지만, 이 후배들을 서포트하는 일을 하고 싶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바꾸는 일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