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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국뽕' 느끼는 한국인…119 구급대서도 외국인 상황시 도움 요청"
(시흥=연합뉴스) 권준우 기자 = '아내한테 주말에 봉사하러 간다고 말하면 '제발 밖에서 하는 만큼 집에서 좀 잘해라', '다른 사람들 도와주는 만큼 집에서 좀 해봐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웃음)"
지난 14일 경기 시흥시의 한 중고차 매매단지에서 만난 김하준(44) 씨의 말투는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갓 성인이 된 2001년 입국해 24년간의 한국 생활, 어느덧 파키스탄인 '오벳'으로 산 세월보다 한국인으로 산 기간이 더 길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잖아요. 처음에는 친구를 따라 그냥 놀러 왔다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공장일, 벽돌 나르기, 트럭 상하차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데 지금은 중고차 업체를 5년째 운영하는 대표가 됐어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김씨지만 이국적인 외모는 그대로다. 그의 표현대로 이마에 '김하준' 석 자가 적혀있는 게 아니기에 처음에는 고객들로부터 "외국인이 파는 차를 어떻게 사" 하는 불신의 눈초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특유의 붙임성과 이윤을 공개하는 투명한 거래 방식에 점점 고객이 늘었고, 중고차 수출 쪽 사업도 점차 확장하면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사무실 직원도 8명으로 늘었다. 물론 직원 중에는 한국인도 있다.
"귀화한 사람들, 한국에서 아이들 낳고 기르려고 정말 한국 사람들보다 두배 세배 노력해요. 아이들을 위해서 투잡, 쓰리잡까지 하는 엄마들도 많아요. 그렇게 대한민국 발전시키는 데 동참하고 있거든요. 저희 세대까지는 몰라도 자식들 세대에선 모두가 하나라는 인식이 더 퍼졌으면 좋겠어요."
김씨는 2015년 같은 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만난 아내 김은해(39) 씨와 2016년 결혼해 7살 아들을 키우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도 이들 부부에겐 그다지 장벽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아내가 "이 사람은 경상도 사람이라, 저 사람은 전라도 사람이라 그렇다"는 식의 표현을 할 때면 김씨가 "파키스탄 사람과 결혼한 당신은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 다문화 시대에 한국의 옛 가치관을 강요하지 말라"고 나무라기도 한단다.
이런 김씨가 요즘 가장 자부심을 가지는 건 안산소방서 다문화 의용소방대 활동이다.
김씨가 속한 다문화 의용소방대는 2023년 3월 안산 단원구 선부동에서 발생한 화재로 나이지리아인 어린 남매 4명이 한꺼번에 숨진 사건을 계기로 창설됐다.
불이 난 다세대주택에는 총 11가구가 있는데 거주민은 41명에 달했다.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피해를 본 나이지리아 가족은 6.5평의 좁은 공간에서 일곱 식구가 지내다가, 갑작스러운 화마에 부모와 2살 막내만이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이후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외국인 화재 안전을 위해 여러 대책을 마련하면서 경기도 최초로 안산시에 다문화 의용소방대를 창설했다.
참여 제안을 받은 김씨는 초대 대장을 맡아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10개국 대원 17명 규모로 시작해 현재는 12개국 20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일부 외국인은 한국에 와서도 자기 나라에서 해 왔던 습관대로 반 칸짜리 집 안에서 고기 구워 먹고 불 피우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몰라서 하는 행동인데 그러다 보면 불이 나거든요. 안산에는 외국인이 워낙 많다 보니 나라별로 자료를 만들어서 안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켜 줘야 해요."
다문화 의용소방대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소화기 사용법 안내, 심폐소생술 교육, 공장 등 사업장에서의 안전 강의, 지역 축제 등 다수 인파가 몰리는 지역에 대한 순찰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새벽 등 취약 시간에 급히 통역이 필요한 순간 다문화 의용소방대가 빛을 발한다.
"119 구급대에 외국인에 대한 긴급 상황에 발생하면 새벽 1∼2시에도 우리 대원들에게 전화가 와요. 병원에서도 연락이 와요. 어디가 아픈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소통이 돼야 하는 데 저희 도움으로 빨리 치료받고 회복하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이런 김씨는 7살 아들의 자랑거리다. 출근길엔 종종 김씨를 붙잡고 "같이 놀자"며 떼를 쓰는 아들이 태극기가 달린 의용소방대 정복을 입고 집을 나설 때면 "충성" 구호를 외치며 경례까지 한다고 한다.
"이 아이가 크면 우리가 하는 봉사를 통해 사회가 변화해가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받아줬으면 좋겠고, 함께 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니까 우리가 지키는 거죠. 아이 중에서 부모가 다문화인이면 피부색이나 생긴 모습 때문에 같이 나가기 싫어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앞으로 그럴 일도 없었으면 하고요."
김씨는 한국인으로 사는 삶에 대한 물음에 대해 "'국뽕'을 느낀다"고 답했다. 외국을 나가며 대한민국 여권을 제시할 때마다 입국심사관들이 외모를 보고 놀라면서도 한국인임을 확인한 뒤 친절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에 감동한다는 것이다.
정작 한국인들 사이에 '헬조선', '탈조선' 같은 자조가 만연하게 퍼진 데 대해선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헬조선, 헬조선 하는데 다른 나라 가면 더 힘들어요. 여러 나라 다녀보니까 한국이 양반이에요. 다른 나라에 가면 차별이 더 심해요. 대한민국은 진짜 살기 좋은 나라이고 앞으로도 더 좋아질 거예요."
그는 다문화라는 단어 자체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는 다문화라는 별칭이 붙지 않고 모두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될 거라는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전교생의 절반이 이주민 자녀예요. 물론 거기서도 일부 엄마들이 '백인 애들이랑만 놀아라' 하는 식으로 차별을 조장하기도 하죠. 그런 인식으론 국가도 망치고 애도 망치게 돼요. 젊은 부모님들은 이런 인식이 많이 없어졌어요. 선생님들도 그런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좋고 또 잘 가르치시는 거 같아요. 저는 앞으로의 일이 크게 걱정 안 돼요."
stop@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