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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의 한 고시원. 취업준비생 A씨의 저녁상은 초라했다. 1천500원짜리 편의점 컵라면 하나가 전부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SNS 타임라인에는 딴판인 세상이 펼쳐졌다.
해시태그와 함께 게시된 사진은 서울 청담동 유명 스시 오마카세 식당의 영수증. 결제 금액란엔 선명하게 '35만원'이 찍혀 있다.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댓글과 '좋아요' 알림이 울린다.
이 화려한 저녁을 증명하는 데 A씨가 쓴 돈은 '0원'. 생성형 인공지능(AI) 앱에 식당 이름과 금액만 입력해 단 3초 만에 뽑아낸 '가짜 영수증' 덕분이다.
가상의 사례지만, 이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초거대 AI 기술이 고물가 시대의 그늘과 만나 기형적인 놀이 문화를 낳고 있다. 실제 소비 없이 부유함을 과시하는 이른바 '가짜 플렉스(Fake Flex)', '0원짜리 플렉스' 현상이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허영심을 가장 저렴하게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과 함께 단순한 놀이를 넘어 신뢰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신종 사기 범죄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보기술(IT) 및 보안업계에 따르면 최근 앱마켓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AI 영수증 생성기', '가짜 계좌 인증' 서비스가 우후죽순 등장했다.
과거 포토샵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문서 위조가 누구나 거의 무료로 접근 가능한 모바일 앱 서비스로 내려온 것이다.
해당 앱들은 대부분 영미권 기반이지만 국내 앱 마켓에서도 '영수증 생성' 따위의 키워드만 넣으면 다운로드할 수 있다. 사용법은 상호명에 유명 명품 브랜드나 고가 식당 이름을 적고 원하는 금액과 날짜만 넣으면 끝이다. 복잡한 프롬프트(명령어)도 필요 없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인데 최신 이미지 생성 모델은 종이의 미세한 구겨짐, 인쇄 잉크가 살짝 번진 질감, 실제 메뉴 항목과 서명까지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가맹점 번호나 사업자등록번호 같은 세부 정보까지 템플릿에 맞춰 자동 생성되니 휴대전화 화면만 봐선 일반인이 진위를 가려내기 어렵다.
이 기술은 현재 SNS상에서 일종의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 소비된다.
수억 원대 슈퍼카 계약서부터 수천만 원대 주식 잔고 증명서, 억대 연봉이 찍힌 급여 명세서까지. AI는 청년들이 꿈꾸지만 닿을 수 없는 욕망을 '인증샷'으로 실현해준다.
문제는 기업 현장에서도 악용 사례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경비·재무 자동화 플랫폼 앱젠(AppZen)을 인용해, 2025년 9월 기준 기업에 제출된 허위 문서 중 약 14%가 AI로 만든 가짜 영수증이었다고 보도했다. 2024년까지만 해도 미미했던 수치가 불과 1년 새 두 자릿수로 치솟은 것이다.
◇ '무지출 챌린지'의 역설…"비용 없는 도파민에 중독"
전문가들은 이 같은 '가짜 플렉스'를 고물가와 SNS 과시 문화가 충돌해 빚어낸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진단한다.
외식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인스타그램'에서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욕망은 꺾이지 않았다. 현실의 결핍이 클수록 가상 공간의 자아를 부풀려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작동하는데, 때마침 AI가 아주 정교한 거짓말 도구를 쥐여준 셈이다.
과거 유행했던 '무지출 챌린지'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절약 놀이였다면 지금은 돈을 쓰지 않고도 쓴 척하며 쾌락을 얻는 기이한 형태로 진화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AI 리플리 증후군'이란 자조 섞인 신조어까지 내놓는다.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가상 자아 연출에 매몰된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 "중고 거래 인증 믿어도 되나"…범죄로 번진 놀이
문제는 '가짜 인증'이 개인의 만족을 넘어 타인을 속이는 범죄 도구로 변질했다는 점이다. 기술 장벽이 무너지며 '사기의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섬뜩한 경고마저 나온다.
플랫폼 관계자들은 "동일 구도의 사진에 메모지 내용만 바뀌어 올라온다면 AI 합성을 의심해야 한다"며 "안심결제를 거부하고 계좌이체만 고집하면 십중팔구 사기"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최근엔 수법이 더 교묘해졌다. 명품이나 고가 전자기기를 팔면서 AI로 위조한 '백화점 구매 영수증'을 제시해 가품을 진품으로 둔갑시키거나, 구매 시기를 조작해 가격을 높여 받는 방식이다.
개인 간 금전 거래인 '더치페이'에서도 악용 우려가 크다.
모임 회비나 데이트 비용 정산 시 영수증 금액이나 항목을 AI로 살짝 고쳐 돈을 가로채는 방식이다.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친구가 보낸 영수증 날짜가 미묘하게 어색해 따져 물었더니 연락을 끊더라"는 경험담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플랫폼 사업자들도 비상이 걸렸다.
'AI 가짜 영수증'이 상업적 어뷰징(오남용) 수단이 되자 대응 수위를 높이고 나섰다.
네이버는 최근 스마트플레이스 공지사항을 통해 AI나 편집 툴로 조작한 영수증을 제출해 허위 리뷰를 다는 행위에 대해 강력한 제재 방침을 밝혔다.
네이버 측은 "가짜 영수증을 이용한 허위 방문 리뷰, 금전적 대가를 받고 경험하지 않은 업체를 쓴 것처럼 꾸미는 광고성 리뷰가 적발되면 리뷰 비노출은 물론 작성 권한까지 제한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는 '0원짜리 플렉스'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가짜 맛집과 가짜 평판을 양산해 생태계를 교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다.
IT 업계 관계자는 "과거엔 가짜 리뷰를 위해 '알바'를 썼지만 이젠 AI가 텍스트부터 사진까지 다 만들어주는 시대"라며 "플랫폼들이 신뢰도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방어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고 전했다.
◇ "보는 것=믿는 것"의 종말…신뢰 비용 청구서 날아온다
보안업계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AI 생성물에 대한 규제 및 워터마크(식별 표시) 정책의 시급성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본다.
현재의 디지털 포렌식 기술로는 이미지의 메타데이터나 픽셀 패턴을 분석해 AI 생성 여부를 판별한다.
하지만 위조한 이미지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휴대전화로 다시 찍거나 캡처해서 제출하면 생성 정보가 훼손돼 탐지가 어려워진다. 일명 '세탁' 과정이다.
이에 따라 EU와 미국 등 주요국은 물론 우리 정부도 AI 생성물에 대한 식별 표식 의무화를 추진 중이다.
하지만 법제화 속도가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결국 '보는 것이 믿는 것'이었던 시대는 저물었다.
AI가 찍어낸 '진짜 같은 가짜'들이 범람하면서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검증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기업은 경비 시스템에 AI 탐지 솔루션을 깔아야 하고 개인은 중고 거래 사진 한 장도 의심의 눈초리로 뜯어봐야 한다.
현실의 어려움을 감추려 AI로 치장하는 청년들 그리고 그 기술을 악용해 이득을 챙기려는 범죄자들. 혁신이라 칭송받는 생성형 AI가 우리 사회에 던진 씁쓸한 자화상이다.
'0원짜리 플렉스'가 우리 사회의 신뢰 자본을 갉아먹는 비싼 대가로 돌아오고 있다.
president21@yna.co.kr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