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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나이의 철인 3종 선수가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지난해 초 조재범 코치의 성폭력 의혹 사건 이후 세상이 발칵 뒤집히고, 스포츠혁신위가 발족되고, 8차례의 권고안을 통해 스포츠윤리센터 출범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또다시 일어난 충격적 사건에 체육계는 망연자실하고 있다. 잊을 만하면 고개를 드는 폭력의 그림자, 왜 자꾸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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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전문 체육 지도자가 되려면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대한체육회는 '국가대표 지도자는 전문지도자 자격증 2급 이상, 전문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감독은 5년 이상, 코치는 2년 이상 해당 종목 지도 경력이 있어야 한다. 단 2급 이상 전문스포츠 지도사 자격증을 소지한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지도 경력과 상관없이 위원회 및 이사회 심의 의결을 거쳐 국가대표 지도자로 선임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격증은 기초 조건일 뿐, 실제 지도자 채용은 인맥, 학맥을 통해 소위 '꽂아주기' 식이 대부분이다. 전문지도사 자격증만 따면 코치, 감독이 될 수 있다. 일단 지도자가 되고 나면 평가나 검증, 재교육 시스템은 전무하거나 형식적이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현장 지도 경험 없이도 국가대표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금메달만 따면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받는다.
황승현 교수는 "지도자는 어떤 자격, 어떤 수련과정이 필요하며 어떤 직무를 하는 사람인가. 대표팀은 물론 종목, 시도연맹 모두 '합당한 지도자' '좋은 지도자'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합의점이 없다. 연맹 회장, 주도권을 가진 일부 힘 있는 사람의 생각이 길이 돼왔다. 이참에 지도자 직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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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에게 지도자는 가족과 다름없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강호석 감독은 "'코치'의 원뜻은 마차를 이끄는 안내자"라고 했다. 어떤 '안내자'를 만나느냐는 그 선수의 평생을 결정한다.
황승현 교수는 "현재 한국 지도자들은 선수와 협회 사이에 낀 샌드위치, 감정 노동자로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유연한 사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길 안내를 해야할 코치가 압박감에 쫓기고 있다. 택시 운전사가 급하게 핸들을 돌리고, 과속하고, 신호 위반을 한다. 그 택시를 탄 선수는 어떻게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현장에서 지도자를 평가하는 수단은 오직 금메달뿐이고, 이 때문에 선수의 성적이 지도자의 실적이자 밥줄이고, 선수와 금메달에 집착해 무리수를 두는 악순환은 반복된다. 황 교수는 "금메달 외에 지도자를 평가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다면적인 지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도자가 선수의 경기력에 의해 평가받는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선수들이 잘하는 못하든 지도는 잘할 수 있다. 선수들이 잘하든 못하든 지도를 못할 수도 있다. '지도자가 잘하고 있다'는 정의가 선수들의 금메달이 아니라 코칭의 일,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을 잘하고, 자기계발을 잘하고, 선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좋은 덕목을 가진 선생님도 좋은 지도자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말에 현장 지도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석 감독 역시 "경쟁은 있어야 한다. 금메달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지도자를 평가해선 안된다. 스토리 있는 과정, 과정에 대한 평가 항목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 감독은 "'라뗀 말이야'로 선수들을 이끌 수 없는 시대다. 결국 지도자 스스로 역량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다.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면서 "지도자들도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이럴 때 현장에서 해결책을 제안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소위 '코칭 디벨로퍼'시스템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동현, 안정환 코치는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한 '인턴십' 과정, 체계적 재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김 코치는 "나는 태극마크는 달아봤지만,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다. 초, 중, 고 코치를 모두 거쳐 국가대표 코치가 됐고, 선수 때 실패의 경험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이들은 "현재 지도자 재교육 과정과 내용은 너무 형식적"이라면서 "시대 흐름에 맞는 교육 콘텐츠의 개선 필요성"을 제기했다. 황 교수 역시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선수 이해, 지도자들의 자신감 형성, 훈련 계획서 작성법, 경기분석법 등 현장에 맞는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도자 역량 강화' 지도자가 바뀌어야 산다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일본 등 대부분의 스포츠 선진국들은 이미 체계적인 지도자 자격, 코칭 교육 시스템, 현장 중심의 코칭 스쿨을 운영중이다. 캐나다의 경우 NCCP(National Coaching Certification Program)라는 스포츠 지도자 양성 시스템을 1~5단계 레벨별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캐나다에서 2박3일간 유도 지도자 자격증 프로그램을 직접 이수한 안정환 코치는 "단순히 기술, 지식뿐 아니라, 윤리적 결정, 응급 상황 대처, 선수 능력 개발,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 스포츠 인권 등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전했다. 런던올림픽 때 노메달에 그쳤던 일본 유도가 지도자 혁신을 통해 부활한 사례도 귀띔했다. "옛날 방식을 고수하던 시노하라 감독을 '유도 영웅' 이노우에로 바꾼 후 일본은 2016년 리우에서 역대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2009년부터 2년간 JOC의 제도를 이용해 영국에 코치 유학을 보냈고, 과학적 훈련법을 이수하도록 한 결과다. 제아무리 최고의 선수라 하더라도 코칭은 또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라며 지도자 교육의 힘을 강조했다.
김동현 코치는 "진천선수촌 내에서 지도자들이 서로 노하우를 나누는 스터디, 코칭 방법에 대해 정기적으로 토론하는 문화가 자리잡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호석 감독도 "우리 지도자들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도자와 선수는 상하 관계가 아니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이고 우리는 선수들을 도와주는 서포터다. 선수를 더 잘 돕기 위해, 지도자 스스로 공부하고, 토론하고, 역량을 키우는 혁신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황승현 교수는 "조재범 코치 폭력 의혹 사건 이후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스포츠혁신위가 가동됐다. 고 최숙현 사건을 계기로 지도자 교육 및 선수 육성 시스템을 바꾸고 뜯어고쳐야 한다. 기존의 낡은 시스템을 갈아엎는 국가 차원의 지도자 역량 강화 혁신 TF팀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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