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스 워드 눈물의 은퇴, 그가 걸어온 길

기사입력 2012-03-21 14:27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이방인이었다.

어머니는 한국인이었고, 아버지는 주한미군이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한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불우했다. 이듬해 부모의 이혼으로 그는 아동보호기관의 손에 넘어갔다. 법원은 어머니가 영어를 하지 못해 양육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곱살이 돼서야 어머니와 재회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백인들은 흑인이라고 놀렸고, 흑인들은 한국인이라고 따돌렸다. 한국인들은 흑인이라고 불렀다.

혼혈의 아픔은 컸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아픔을 위로해 준 탈출구가 풋볼(미식축구)이었다.

NFL(미국프로풋볼) 스타인 한국계 하인스 워드(36)가 21일(한국시각) 그라운드를 떠났다. 은퇴를 선언했다.

고교시절 그는 쿼터백으로 풋볼과 인연을 맺었다. 조지아대 진학 후 와이드리시버로 옷을 갈아 입었다. 1998년 NFL 드래프트에서 92번째 선수로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선택을 받았다. 미완의 대기였다. 그가 피츠버그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14시즌 동안 구단의 리셉션(1000회), 리시빙 야드(1만2083야드), 리시빙 터치다운(85개)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꿈의 무대'인 슈퍼볼을 3차례나 밟았다. 두 차례 빈스 롬바르디(슈퍼볼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06년 정점을 찍었다. 그는 '꽃중의 꽃'인 슈퍼볼 MVP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09년 두 번째 정상은 또 달랐다. 부상의 터널을 뚫고 팀의 맏형으로, 정신적 리더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한국도 주목했다. 2006년 4월 9박10일 일정으로 어머니 나라이자 고향을 다시 찾았다. 금의환향이었다. 서울시청에서 538번째 '서울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감격스럽다. 한국인 핏줄을 갖고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눈물을 흘렸다. 세월의 아픔이 묻어난 감회였다.


이듬해 그는 '하인스 워드 재단 기금'을 설립, 한국 내 다문화 및 다인종 문제 해결 및 지원에 소매를 걷어올렸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그는 지난해 한미관계 홍보대사로 위촉돼 활발하게 활동했다.

세월은 거스를 수 없었다. 부상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팀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지난달 피츠버그는 방출을 통보했다. 은퇴 기로에 선 그는 "여전히 내 가슴속엔 미식축구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남아있다. 다가오는 시즌에 NFL 그라운드에서 뛰길 고대한다"고 했다. 선수생활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피츠버그와 인연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워드는 이날 피츠버그에서 눈물의 은퇴 기자회견을 가졌다. 만감이 교차했다. "달콤씁쓸하다. 이게 내 시대의 끝인가보다. 후회는 없다. 스틸러스 선수로서 공식 은퇴한다. 더 뛸 수 있지만 이게 맞는 것 같다.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스틸러스 일원으로 남을 것이다." 아쉬움의 눈물을 쏟아냈다.

상대에게 과격한 태클을 당해도 웃음을 잃지 않아 '살인 미소'로 불렸다. "늘 겸손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NFL에서 '가장 겸손한 선수'로 알려져 있다.

풋볼은 거칠다. 상대와 뒤엉켜 혈전을 벌인다. 부상은 끊이지 않는다. 평균 은퇴 연령은 30대 초반이다. NFL 역사는 영원히 그를 기억할 것이다. 명예의 전당 헌액도 유력하다. 명예의 전당 투표는 은퇴 후 5년이 지나고 나면 진행된다.

"세 번 슈퍼볼에 진출하고 두 번 우승했다. 슈퍼볼 최우수선수로도 선정됐는데 선수로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느냐." 36세 워드가 풋볼과 이별했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Copyright (c) 스포츠조선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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