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부산아시아선수권 혼합복식 우승 직후 '왼손 에이스' 박영숙(25·한국마사회)이 관중석으로 깡충깡충 뛰어올라왔다. 스승 현정화 한국마사회 총감독의 품에 안겼다. 스승과 뜨겁게 포옹한 박영숙이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환희의 순간, 스승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독했다. 1년 후 인천아시안게임까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야, 울지 .마! 아직 멀었어." 그러나 분명히 보았다. '애제자' 박영숙이 금메달을 확정지으며, 주머니속에 고이 품은 아버지 사진을 들어올리는 순간 '철녀' 현정화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현정화에게 박영숙이란?
"감독님, 우리 딸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감독님만 믿고 갑니다." 7년 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딸을 맡기고 뒤돌아서던 '영숙이 아버지'의 한마디는 현 감독에게 '필생의 약속'이 됐다. 박영숙의 금메달 순간 현 감독은 그 약속을 떠올렸다. 박영숙이 아버지 사진을 하늘로 들어올리는 순간, 흐르는 눈물은 불가항력이었다. '영숙이 아버지'는 막내딸의 2009년 카타르오픈 출전중 세상을 떠났다. 박영숙은 뇌종양 투병중이던 아버지의 임종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이후 현 감독과 박상준 한국마사회 코치는 박영숙의 '부모'가 됐다. 경기가 잘풀린 날도 안풀린 날도, 소주잔을 기울일 때마다 "영숙이, 영숙이"를 외쳤다. 매대회 '영숙이'의 플레이를 복기하며 가장 흐뭇해하고 가장 안타까워해온 이들은 가족 이상이었다. '현정화에게 박영숙이란?'질문에 주저없이 답했다. "내 딸!"
'매의 눈' 현 감독은 박영숙의 가능성을 믿고 선택했다. 천부적인 에이스는 아니지만, 파워풀한 왼손 백드라이브 필살기에 강인한 체력, 승부욕을 갖췄다. 세계 70~80위권을 맴도는 이 선수를 국내 복식랭킹 1위에서 혼합복식 세계 1위로 키워냈다.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은 아니다. 대표팀 추천전형때마다 '왼손 스페셜리스트' 박영숙을 적극적으로 천거했다. 의심과 불신의 시선도 뒤따랐지만 굴하지 않았다. 현 감독은 "나는 어떻게 하면 복식을 잘할 수 있는지 안다. 움직임과 루트를 안다. 복식에 강한 선수는 따로 있다"고 제자를 두둔했다. 현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선배 양영자와 함께 여자복식 금메달을, 유남규 현 남자대표팀 감독과 함께 도르트문트세계탁구선수권에서 혼합복식 금메달을 따냈었다. 자신의 금메달 노하우를 애제자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23년 후 부산아시아선수권 혼합복식 결승전, 현정화의 '금메달 파트너' 유남규가 '현정화 애제자'의 벤치에 앉았다. 김형석 여자대표팀 감독이 기꺼이 유 감독의 지략을 믿고 자리를 양보했다. 1988년, 1990년 아시아선수권 혼합복식을 2연패했던'현정화-유남규'조의 지혜가 차세대 '박영숙-이상수'에게 전수됐다. 대를 이은 짜릿한 금메달이 완성됐다 .
사진제공=월간탁구 안성호 기자
박영숙에게 현정화란?
박영숙은 서울여상 졸업 무렵 복수의 실업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파워 드라이브를 장착한 왼손 에이스의 '존재감'은 매력적이었다. 박영숙은 스스로 '현정화의 제자'가 되길 희망했다.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이번 한번만 내뜻대로 하게 해달라"고 고집을 피웠다. 박영숙에게 스승 현정화는 운명이었다.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자 더 잘해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여자탁구의 레전드가 자신의 선생님이라는 것은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현정화의 제자'라는 꼬리표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추천전형으로 선발될 때마다 더 잘하기 위해, 스승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실업 7년차, 10대 소녀는 어느덧 20대 숙녀가 됐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도, 승부에 냉정해지는 법도, 승부보다 의리가 중요하다는 것도, 소주 한잔 하고 털어내는 법도 모두 스승에게 배웠다. 그 긴 세월동안 스승은 단 한번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세계 78위의 박영숙이 파리세계선수권 혼합복식 은메달에 이어, 부산아시아선수권 혼합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현 감독 아래서 세계 챔피언으로 성장했다. 이제 '청출어람'을 꿈꾼다. '박영숙에게 현정화란?' '박영숙을 끝까지 믿어준 사람!' 짧은 한줄속에 지난 7년간 치열한 세월이 녹아 있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