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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지난 4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라이브 아레나 공연장을 찾았다. 빙판에서 펼쳐지는 '호두까기 인형' 피겨스케이팅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이날 은반에서 펼쳐진 호두까기 인형의 주인공 '마리' 역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은메달리스트 알렉산드라 트루소바(22)가 맡았다.
화려한 점프와 안무로 꾸며진 공연이 끝나고 무대 인사가 이어질 때 트루소바는 아기를 안고 등장했다. 2024년 동료인 남자 피겨 싱글 선수 마카르 이그나토프와 결혼한 트루소바는 지난해 8월 아들을 출산했다. 현지 기사에 따르면 그는 출산 한 달 만에 빙판에 복귀했고 모유 수유를 하는 중에 이 공연에 출연했다고 한다.
아들을 안은 트루소바의 옆에는 남편인 이그나토프가 서 있었다. 이그나토프도 이번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함께 출연했다. 트루소바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성을 이그나토바로 바꿨다.
출연자 중 가장 마지막으로 소개된 트루소바는 무릎 높이에서 몸을 뒤로 젖히는 시그니처 동작 캔틸레버를 선보이며 관객에게 인사했고 팬들은 꽃다발 선물로 화답했다.
4년 전 베이징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나만 금메달 없어"라며 오열했던 것과 비교해 훨씬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당시 트루소바는 올림픽에서 여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다섯 차례나 성공하는 새역사를 쓰고도 기대했던 금메달을 자국 동료 선수에게 내줘 무척 억울해했다.
트루소바는 호두까기 인형 공연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또 다른 차이콥스키 발레 음악 기반 공연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출연했다. 이 작품에는 트루소바가 놓쳤던 베이징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싱글 금메달의 주인공 안나 셰르바코바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 등 다른 러시아 피겨 스타들도 출동했다.
트루소바가 출연한 호두까기 인형과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은 올림픽 메달 4개를 획득한 러시아의 피겨 전설 예브게니 플루셴코가 이끌었다. '플루셴코 사단'에 맞서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아이스댄싱 금메달리스트인 타티야나 나브카도 이번 연말연시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선보였다. 나브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하는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의 아내다.
나브카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는 4년 전 베이징 동계올림픽 최고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던 카밀라 발리예바가 출연했다. 당시 발리예바는 세계 최고 점수 기록을 보유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최대 기대주로 주목받았지만, 도핑 파문에 휩싸여 단체전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개인전에서는 부진한 성적을 거둬 고개를 숙였다.
발리예바는 러시아에서 여전히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발리예바는 4년간 선수 자격 정지 처분도 받았지만 지난달 25일을 기해 징계가 종료돼 다시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회복했다.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은 발리예바가 호두까기 인형에서 '생쥐 여왕' 역할을 맡아 2가지 트리플 점프를 뛰었다고 보도했다. 팬들은 발리예바의 연기에 열광하며 얼음에 곰 인형을 던지며 환호했으며, 온라인에서는 "지금 당장 올림픽에 보내자"라는 반응도 나왔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이처럼 갖가지 논란을 뒤로 하고 러시아의 피겨 스타들은 열띤 응원을 받으며 빙판을 누비고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올겨울 러시아의 아이스쇼 무대는 풍성했다.
그러나 화려한 조명과 박수갈채에도 이들의 무대에는 씁쓸한 뒷맛이 맴돈다. 여느 때 같으면 이 시기에 이 선수들이 이런 쇼에 출연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달 6일 이탈리아에서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이 개막한다. 정상급 피겨 선수들이라면 올림픽 출전권 확보와 메달권 경쟁을 위해 크리스마스·신년 분위기는 제쳐두고 훈련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다.
4년 전 금메달을 놓쳤다며 눈물을 쏟았던 트루소바는 올해 설욕을 꿈꾸지도 못한다. 러시아 선수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에 따른 제재로 국제대회 출전에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다. 도핑 파문까지 일어나 러시아 대표팀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피겨 종목을 비롯해 소수의 선수가 러시아 국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중립선수(AIN)로 이번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그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 징계 여파로 선수들의 수준이 퇴보했다는 한탄이 나온다.
러시아 매체 스포츠24에 따르면 러시아 피겨 스케이팅 코치 알렉산드르 줄린은 "과거 러시아에는 '위대한' 셰르바코바, 발리예바, 트루소바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의 여자 선수들이 전혀 없고 가까운 미래에도 눈에 띄는 선수가 없다"고 말했다.
abbie@yna.co.kr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