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선수들의 '의지'가 돋보였다. 감독이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했다. 베테랑 선수들은 삼성화재의 또 다른 힘이었다.
2012년 마지막 날이었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삼성화재는 위기 상황이었다. 22일 러시앤캐시와의 홈경기에서 0대3으로 졌다. 3일 뒤 대한항공과 원정경기에 3대1로 승리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29일 LIG손해보험 원정경기에서 0대3으로 완패했다. 하락세였다. 삼성화재는 1라운드에서 5전 전승, 2라운드에서는 4승 1패를 기록했다. 그런데 3라운드 들어 2패(2승)를 당했다. 1일 홈에서 라이벌 현대캐피탈과 3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모바일 메신저였다. 주장 고희진(33)이 사진을 한장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고희진이 서 있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머리카락 깎았습니다. (여)오현이형도 지금 밀고 있습니다'는 메시지와 함께였다. 고희진의 뒤에는 레오(23)에게 머리를 맡긴 여오현(35)이 있었다. 신 감독은 빙긋이 웃었다.
삭발은 고희진이 생각해냈다. 팀내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자극을 줄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만 삭발하려고 했다. 30일 레오에게 부탁해 머리카락을 밀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내와 3명의 아이가 놀랄 것을 염려했다. 그래도 삭발을 하기로 결심했다. 고희진은 "내게는 매 시즌이 위기다. 우승하지 못하면 은퇴해야 한다. 소중하고 즐겁게 배구하는 것도 내려놓아야 한다. 가족들이 뭐라 하기는 했다"고 말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여오현이 동참을 선언했다. 팀을 걱정하는 후배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여오현은 자주 삭발을 했다. 크게 손해볼 것이 없었다. 여오현의 합류에 고희진은 '감사합니다. 형님은 힘이 되는 존재입니다'고 문자를 보냈다. 여오현도 '열심히해보자. 파이팅하자'고 답장했다.
다만 기술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헤어디자이너로 낙점받은 레오의 이발기가 문제였다. 레오는 평소 머리카락을 밀어버린다. 때문에 '길이 조절기'가 없었다. 고희진과 여오현은 '기왕에 미는 건데'라며 머리카락을 밀어버렸다. 다른 문제도 하나 더 있었다. 팀 내 최고참 석진욱(37)도 동참한다고 할까바 걱정이었다. 두 후배는 석진욱의 삭발만은 막았다. 후배들이 너무 긴장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을 염려했다.
삭발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고희진은 1세트 첫 득점을 올리며 상승세를 이끌었다. 여오현은 안정된 리시브와 디그로 수비에 힘을 보탰다. 선배들의 활약에 후배들도 힘을 냈다. 박철우(28)는 18점을 올렸다. 레오는 26득점했다. 선수들이 펄펄 난 삼성화재는 현대캐피탈을 3대0(25-15, 25-21, 25-20)으로 완파했다. 신 감독은 경기 후 "선수들이 삭발하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 꼭 머리카락을 안 깎으면 배구를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선배 선수들이 알아서 팀의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삼성화재는 12승3패(승점35)로 선두질주를 이어갔다. 2연패의 부진에 빠진 현대캐피탈은 9승 6패(승점27)로 2위 자리를 유지했다. 대전=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