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서)효원이를 데려올 때 틀림없이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현정화 한국마사회 총감독(대한탁구협회 수석 부회장)이 '애제자' 서효원을 영입하던 17년 전, 오래 전 그날을 떠올렸다. 2008년 현대시멘트 탁구단의 해체 직후다. 현 감독은 "근화여고 시절부터 효원이를 데려오려 했다. 스승인 윤길중 감독님이 현대시멘트를 창단한다고 해 효원이를 어쩔 수 없이 보냈지만, 팀이 해체됐다니 '우리가 데려오자'고 했다"고 떠올렸다. 현 감독은 서효원의 집 경주로 직접 내려가 어머니를 설득했다. 서효원의 마음은 달랐다. "사실 다른 팀을 가려 했다. 당시 난 주전도 아니었다. 국가대표도 안될 것같고, 탁구를 좀만 더 하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까 했다."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재능을 믿고 키운 건 눈 밝은 스승이었다. "효원이가 뭘 잘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고 기다렸다. 기막힌 서브와 파워를 갖고 있었다. 효원이만의 장점이 경기에서 나오면 무조건 된다고 믿었다"고 했다. "우리 팀에 와서 핌플러버로 바꿨는데 1년간 단 1승도 못했다. '맘 편히 해라. 어차피 공격 연습만 더 하면, 틀림없이 잘 된다'고 했다."
2013년 코리아오픈, '공격하는 수비수' 서효원은 보란듯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세계 8위 대한민국 톱랭커, '탁구얼짱'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12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쉼없이 달렸다. '월드클래스' 스승의 안목은 적중했다.
은퇴 전 마지막 목표 삼았던 파리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서효원은 경기 중 손가락을 다쳤다. 전매특허이자 필살기인 고공 서브가 불가능했다. 매 대회 진통제 투혼으로 버텼지만 새끼손가락을 구부리기 힘들 정도에 이르면서, 결국 사랑하는 탁구와의 힘든 이별을 결심했다. "라켓이 제대로 안잡힌다. 후회없이 했다. 탁구를 너무 사랑해서 놓지 못했는데, 내 기술을 100% 할 수 없다면 그만 해야 한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된다는 게 아쉬웠다. 나도 모르게 '최대한 안 아프게 치자'는 생각이 들면서 은퇴를 결심했다"고 했다. 현 감독은 "'이제 손목에 진통제 주사 그만 맞으라'고 했다. 우리팀 에이스가 진통제로 버티는 모습이 안타깝고 보기 힘들었다"며 마음을 털어놨다.
2025년 6월 30일, 현정화 감독과 서효원의 17년 아름다운 동행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됐다. 탁구는 물론 전종목을 통틀어도 한 클럽에서 17년을 동고동락한 사제지간은 드물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성장한 세월이다. '현정화에게 서효원이란'이란 질문에 현 감독은 "효원이와는 사제지간을 넘어 마사회를 함께 지켰다는 의리, 동지애가 있다"고 했다. "함께 울고 웃고 17년이다. 잘되면 너무 기쁘고 안되면 억울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선수인데 수비전형의 불리함으로 올림픽 선발전에서 탈락할 때면 '국제무대선 틀림없이 팀에 도움이 될 텐데' 하는 생각에 정말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현정화=금메달'로 통했던 시대,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 여자단식 우승 이듬해 은퇴한 현 감독은 "나는 더 이상 1등을 못할 것같아 박수 칠 때 떠나는 마음으로 빨리 은퇴한 면도 있었다. 감독이 되고 나서도 탈모가 올 만큼 성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선수들의 성장을 보는 게 좋더라. 꼭 1등 선수가 아니더라도 선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키워 1등을 만들 수 있다는 보람을 알게 됐다"고 했다.
서효원은 "현정화의 제자라서 행복했다"고 했다. "감독님 기대엔 못미치는 제자였을 수 있지만 '현정화 제자'라서 더 큰 관심을 받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했다. '현정화 제자'라는 수식어가 부담되기보단 그냥 좋았다"며 웃었다. 서효원은 "마사회에 오면서 선생님들 덕분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경기를 잘 못하면 감독님이 엄청 혼내셨는데 기분이 안좋기보다 '날 키우시려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는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현 감독님의 지지않는 멘탈과 독기, 박상준 감독님의 치밀한 작전, 심리, 공격 기술에 같은 수비전형인 김복래 코치님의 끈기 있는 지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일일이 감사를 전했다.
17년의 운명적인 동행, 가장 기뻤던 순간은 사제가 이구동성이었다. "2013년 코리아오픈 단식 첫 우승, 2011년, 2018년 종합선수권 단식 우승했을 때." '탁구여제' 현 감독은 "특히 수비 선수가 종합선수권 개인 단식을 두 번이나 우승했다는 건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위대한 역사"라고 평가했다. 가장 아쉬운 순간은 "지난해 파리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한 것." 현 감독은 "효원이가 파리에서 라스트댄스를 하길 바랐다. 세계 30위 이내에 들면 됐는데 선발전 일정이 정해지고 난 후에 '세계 3위' 중국 첸싱통을 이기고 뒤늦게 27위까지 올라가더라. 너무 아까웠다"고 돌아봤다.
'가장 오래, 가장 잘하는 선수' 서효원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현 감독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긍정의 마인드"라고 답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즐겁게 운동하는 선수는 없었다. 탁구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선수다. 생활도 단순하다. 탁구 외 딴 생각을 안한다"고 했다. 서효원은 "탁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날 여기까지 오게 했다. 내 인생의 엔돌핀은 탁구로부터 나온다. 탁구할 때 가장 행복하다. 경기를 잘하든 못하든 똑같이 매순간 열심히 준비하고 훈련했다"고 돌아봤다.
스승이자 멘토인 현 감독은 은퇴를 앞둔 서효원에게 여자탁구대표팀 코치직 지원을 제안했다. 여자대표팀의 주장으로서 후배들을 이끄는 솔선수범, 조용한 카리스마, 너른 마음에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봤다. "나는 효원이의 감독 이전에 선배이고, 엄마의 마음, 언니의 마음이다.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하고 길을 제시해주는 것도 여자탁구를 위해 내가 할 일"이라고 했다. 서류, 면접 전형을 거친 서효원의 여자대표팀 막내코치 입성, 지도자로서의 첫 도전이 임박했다.
서효원은 "현 감독님은 그냥 '탁구 감독님'이 아니라 '내 인생의 감독님'이다. 감독님을 만나 내 인생이 달라졌고, 마인드도 달라졌다"고 했다. 17년 전, 오똑한 코가 닮았던 스승과 제자는 이제 여자탁구를 향한 진심,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도 닮은꼴이다. 서효원은 "후배들이 제 말투가 현 감독님과 똑같다고 한다"며 웃었다. '17년 전 엄마의 선택이 옳았다'는 말에 '현정화 제자' 서효원이 보조개 미소를 띄웠다. "엄마가 옳았죠. 엄마가 요즘도 '내 말이 맞았지? 내 덕분인 줄 알아, 감독님 말씀 잘 들어' 하세요." 인천=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