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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도 인정 받는 시대다. 올시즌 두산 좌완 유희관(27)은 시속 100㎞도 안 되는 '아리랑 커브'를 수차례 던져 화제가 됐다. 그의 직구 최고구속은 130㎞대 중반. 느려도 상대와 효과적으로 승부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사실 윤성환 하면 '소리 없는 강자' 같은 말이 어울린다. 그도 그럴 것이 2009년 다승왕(14승) 출신임에도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또한 수준급의 선발투수가 많은 삼성에 있어 조금 손해를 봤다. 다른 팀이었다면 에이스급 활약이었겠지만, 삼성엔 그와 비슷한 임팩트를 가진 이들이 많다.
그때마다 강속구를 던지는 이들이 부러웠다. 아마 그가 마운드 위에서 보다 '임팩트'를 보여줬다면, 그를 향한 시선도 달랐을 것이다.
지난 2011년 삼성은 시즌 도중 대체 외국인선수로 저마노를 데려온 적이 있다. 당시 류중일 감독은 "윤석민을 원했는데 윤성환이 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140㎞대 초반의 직구에 낙차 큰 커브를 던지는 저마노는 윤성환과 스타일이 비슷했다. '보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으면' 하는 마음에 한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윤성환에겐 아픔이 될 수 있는 한 마디였다.
하지만 윤성환 역시 본인의 스타일을 알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윤성환은 "사실 아직도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이 부럽다. 하지만 바뀔 수 있는 건 없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 안에서 최대한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당당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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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그는 자신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노선을 잡았다. 그동안 직구와 커브, 사실상 투피치 투수에서 레퍼토리가 다양한 팔색조 투수로 변모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때부터 조짐이 보였다. 그동안 많이 던지지 않던 슬라이더 비율을 높이면서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9월에 우연히 팀 동료 안지만에게 그립을 배운 게 시작이었다. 안지만은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구사하는 반면, 윤성환은 컷패스트볼성으로 빠르게 꺾여 들어간다.
사실 상대 타자들은 윤성환과 승부할 때 '직구 아니면 커브'란 생각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레퍼토리가 적은 투수의 단점이다. 한국 최고 수준의 커브를 가졌음에도 분명한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하지만 올시즌 윤성환은 슬라이더를 커브와 비슷하게, 혹은 더 많게 구사한다. 상대 타자들은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여기에 회심의 무기, 포크볼도 있다. 시즌 전 카도쿠라 인스트럭터에게 배운 포크볼이다. 카도쿠라의 그립에서 자신의 손에 맞게 살짝 변형했는데 의외로 만족스럽다. 아직 많이 던지기엔 완성도가 떨어지는 듯 해 부담스럽지만,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상대의 혼을 쏙 빼놓는 결정구로 쓰고 있다. 직구-커브-슬라이더를 생각하던 타자는 포크볼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
윤성환은 "그동안 타자와 상대할 때 볼배합이 막힐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젠 슬라이더 덕에 조금 쉬워졌다. 정 막히면 가끔씩 포크볼을 던진다. 아직 만족스럽지 않지만, 간간이 잘 들어간다"며 "우리 팀 타자들도 구종이 1개라도 더 있으면 상대할 때 유리하다고 하더라.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생각이 많아지는데 포크볼까지 던져 효과가 크다고 했다"고 말했다.
사실 윤성환은 주변 동료들에게 '커브 그립을 가르쳐달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KIA 김진우와 함께 현존 최고의 커브볼러이기 때문. 윤성환은 "사실 그립을 가르쳐줄 수는 있다. 하지만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어렵다. 똑같이 잡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처럼 던질 수는 없다. 카도쿠라 인스트럭터가 꽉 쥐라고 했지만, 난 힘을 빼니 효과가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결국 슬라이더나 포크볼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엔 오랜 노력이 있었다. '막힌다'는 고민에서 출발한 윤성환은 끝없는 연구 끝에 레퍼토리를 2개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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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환은 지난해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였다. 1차전에서 5⅓이닝 1실점(비자책)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시리즈 기선제압을 위한 선봉장 역할을 제대로 했다. 2승2패로 동률이 된 5차전에선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팀의 2대1 승리에 발판을 놨다. 승리투수는 되지 못했지만, 5차전 MVP는 그의 몫이었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2연패의 주역이었다.
올해 역시 우승을 꿈꾼다. LG가 시시각각 삼성을 위협하고 있지만, 삼성 선수들에겐 자신감이 있다. 당연히 1등을 한다는 생각이 퍼져있다. 윤성환은 "다른 팀들은 모두 4강을 목표로 말하더라. 우린 우승이 목표다. 모두들 당연히 1등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자신감과 자부심, 여기에 긍정적인 마인드가 강점인 것 같다"고 했다.
자신감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2차 드래프트로 삼성 이적 후 재활 뒤 올시즌 1군에서 뛰고 있는 신용운은 동료 투수들에게 '정말 우승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윤성환을 비롯한 동료들은 "내가 우승시켜줄게"라며 기운을 북돋아준다. LG와 매일 1위 자리를 다투는 '위기'지만, 삼성은 조금씩 '우승 DNA'가 발동되고 있다.
올해도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올라간다면, 1차전 선발투수는 누가 될까. 실질적 에이스인 윤성환 역시 욕심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사실 우리팀 투수들은 모두 잘 하니까 누가 되도 이상하지 않다. 1차전 선발투수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겠지만, 어느 팀이 올라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며 "일단은 우승이 중요한 것이니 내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그런 욕심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윤성환은 벌써 한국시리즈를 바라보고 있다. 강속구를 갖지 못했지만, 누가 보기에도 안정감이 넘치는 피칭을 하는 그야말로 삼성의 실질적인 '에이스'가 아닐까.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